세계 무역이 자유무역 체제에서 전략적 패권경쟁 체제로 이동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월 4일과 5일(현지시각) 잇따라 발표한 두 편의 심층 보도를 통해 이러한 변화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반도체 사업이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 있다. 미국 반도체 지원법의 '가드레일' 조항은 이들 기업의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을 향후 10년간 5% 이상 확대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미국이 반도체 장비의 중국 반입 규제를 한시적으로 유예한 상황에서, 이에 양사는 미·중 갈등 심화에 대비해 글로벌 생산기지 다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테일러 공장 증설과 인도, 베트남 등 새로운 생산기지 확보를, SK하이닉스는 미국과 유럽 진출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정책을 이끌 피터 나바로는 "리카르도가 죽었다"며 자유무역 시대의 종식을 선언했다. 나바로의 '마가노믹스'는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한 고율 관세와 산업정책을 핵심으로 한다.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미국이 상실한 제조업 기반과 기술 주도권을 회복하겠다는 전략이다.
중국은 이에 맞서 전방위적 대응을 전개하고 있다. 2024년 말 시진핑 정부는 반도체 핵심 광물 수출 제한, 미국 드론 산업 견제, 엔비디아 반독점 조사 등 구체적 보복 조치를 시행했다. 더 나아가 위안화 국제화, 신흥국과의 무역 확대, 첨단기술 자립 등 장기적 대응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러한 미·중 간 패권경쟁은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을 촉발하고 있다. IMF에 따르면 2023년 세계 각국이 시행한 2500개의 산업정책 중 67%가 무역 흐름을 왜곡했다. 43개국이 참여하는 아이폰 생산망과 같은 복잡한 글로벌 가치사슬이 효율성보다 안정성과 안보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보호무역 정책은 한계도 드러냈다. 첫 임기 중 대중 고율 관세에도 불구하고 무역적자는 2016년 3470억 달러에서 2020년 3108억 달러로 10.4% 감소하는데 그쳤다. 관세가 달러 강세를 부르고 이는 다시 수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의 상호연결성은 오히려 강화되는 추세다. NYU 스턴 경영대학원의 글로벌 연결성 지수는 국가 간 경제활동의 통합 정도를 0-100% 척도로 측정한 것으로, 2022년 25%를 기록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세계 각국의 무역, 자본, 정보, 인적 교류의 복합 연결 수준을 측정한 것으로, 코로나19와 지정학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세계화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은행 자료에서도 GDP 대비 교역액 비중이 1990년대 초 30%에서 2023년 56%로 크게 증가했다.
한국 경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수출 의존도 80%, 대중·대미 교역 비중이 40%에 달하는 한국은 무역질서 재편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등 핵심 산업이 미중 갈등의 중심에 있어 전략적 선택이 어려워졌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대응 전략으로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공급망 다변화다. 동남아, 인도, 멕시코 등으로 생산기지를 확대하고 원자재 조달처를 다양화해야 한다. 둘째, 기술 주도권 확보다. 반도체 설계, 배터리 소재, 인공지능 등에서 독자 기술력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시장 개척이다. 신흥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확대로 수출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
세계 무역은 이제 단순한 상품 교환을 넘어 기술패권과 경제안보의 핵심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은 미중 양국 사이에서 적극적인 균형 전략을 구사하면서, 기술력과 시장 다변화를 통해 경제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무역질서의 대전환기를 맞아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전략 수립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