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새해가 다가온다. 을사년 하면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을 우선 떠올리게 된다. 쓸쓸하고 스산한 분위기라는 뜻이다. 그 말의 어원도 참으로 서글프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인 ‘을사늑약’에서 나왔다. 국어학계의 다수설은 ‘을씨년’을 ‘을사년(乙巳年)’의 변형으로 보고 있다. ‘을씨년’이라는 단어가 ‘을사년’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이완용 등을 내세워 강압적으로 늑약(勒約)을 맺은 해가 바로 을사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인 1905년 11월 7일 우리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다. 그때부터 우리는 주권을 잃고 사실상 일제 치하로 들어갔다. 당시 초겨울의 삼천리 방방곡곡에는 웃음소리가 끊기고 침통하고 비장한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이때부터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몸뿐 아니라 마음이나 날씨가 몹시 어수선하고 침울할 때면 늑약 체결 직후 을사년의 비통하고 스산한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을사년스럽다’가 ‘을씨년스럽다’로 변해 굳어졌다. ‘을씨년+스럽다’의 형태로, 명사 ‘을씨년’에 ‘그러한 성질이 있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스럽다’가 붙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국어사전들은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을 ‘을사년’에서 찾고 있다. 북한에서도 기분이 아주 나쁘거나 소름 끼치는 기분을 표현할 때 ‘을씨년스럽다’고 한다.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Economy)’라는 영어 단어는 고대 그리스 헬라어인 ‘οἰκονομία’에서 유래했다. 이를 영어로 읽으면 오이코노미아(Oikonomia)다. 오이코노미아는 가정 또는 인간의 삶을 의미하는 ‘오이코스(oikos)’와 관리 또는 통제라는 뜻의 ‘노미아(nomia)’가 합쳐져 만들어진 합성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플라톤의 학문적 동반자였던 크세노폰이 처음 만든 단어다.
기원전 400년경 크세노폰이 쓴 Oikonomikos는 가장의 덕목을 다룬 윤리적인 성격의 책이었다. 희소한 자원의 효율적 선택과 배분을 통해 사회에 미치는 결과를 연구하는 거대한 학문인 경제학은 ‘가정 관리’라는 작은 곳에서 시작됐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오이코노미아는 곧 정치의 목적”이라고 갈파했다. 그중 ‘노미아’라는 단어를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헬라어로 쓰인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주재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을 '노미아'로 표현하고 있다. 한글 성경에서는 흔히 경륜으로 번역돼 있다. 에베소서 3장 2절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를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오이코노미아는 천지창조와 관리라는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으로 볼 수 있다.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인간 구제의 섭리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거대한 개념이다. 크세노폰의 오이코노미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코노미아를 거쳐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에꼬노미(économie)', 영어권에서는 '이코노미(economy)'로 발전해 왔다.
한자로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 혹은 '경국제민(經國濟民)'을 줄인 말이다. 경세제민은 '세상을 다스리고(經世) 백성을 구제(濟民)한다'는 장자(莊子)의 말에서 유래했다. 유가 철학의 대표적 경전인 ‘대학’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집안이 가지런하게 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세상이 태평하게 된다는 의미인데, 이는 거대한 조직이 바로 작동하기 위해 나와 개개의 가정이 잘 다스려져야 한다는 뜻이다. 가정 관리에서부터 ‘인간 구제’로까지 이어지는 크세노폰의 오이코노미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경제는 이처럼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개인은 물론 국가나 민족의 흥망성쇠도 경제에 의해 좌우된다. 와스프(WASP)로 불리는 앵글로-색슨이 근대 이후 세계사를 주도해온 것은 산업혁명으로 경제 발전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동서 냉전체제에서 구소련이 무너진 것이나 구한말 우리 민족이 식민의 나락에 빠진 것도 따지고 보면 오이코노미아에서 실패한 탓이다.
다행히 우리는 광복 이후 절치부심해 절대 빈곤에서 헤어났다. 지금은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에 진입해 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세계사에 앞장서 이바지하면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변신하고 있다. K팝을 비롯한 한국 예술과 문화가 글로벌 무대에 넘실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경제력 신장 덕이다. 경제학에 '중진국의 함정'이라는 개념이 있다. 세계은행(WB)이 2006년 아시아경제발전보고서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다. 많은 아시아 나라들이 후진국에서 중진국까지는 급속한 성장을 하다가 선진국 문턱에서 다시 주저앉는 현상을 보고 만든 말이다. 우리 경제도 선진국에 진입한 이후 상당 기간 성장이 정체돼 있다.
이런 가운데 계엄령과 탄핵 사태가 터지면서 원화 가치가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정국 불안에 외국인 자금의 유입이 줄면서 원·달러 환율이 급격히 치솟고 있다. 환율 상승은 수출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순기능도 있지만, 원화 가치가 너무 빠른 속도로 떨어지면 수입물가 폭등과 외환보유액의 고갈 등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 물론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 웬만한 충격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내공이 쌓여 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1997년 외환위기도 펀더멘털이 양호한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다. 미국 같은 기축통화국이 아닌 나라에서는 환율 불안이 언제든지 국가 부도로 이어질 수 있다. 해가 지지 않는다던 영국도 1980년대에 환율 관리에 실패해 외환 부도를 맞은 적이 있다. 무역 의존도가 높고 외국 자본 비중이 높은 나라에서는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4000억 달러 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보다 39배 많다. 외국인 자금이 이탈한다고 해도 웬만한 쇼크는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다. 문제는 심리적 붕괴다.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한꺼번에 달러가 빠져나갈 수 있다.
경제는 어차피 사람이 끌어가는 것이다. 오이코노미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이다. 지도자도 중요하지만, 구성원 모두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동력이다. 각 개인이 자신의 위치나 처지에서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하면 그 조직과 단체의 생산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증권시장의 주식과 채권이 그 대표적인 예다. 투자자들이 우량 종목을 잘 골라 거기에 집중적으로 투자한다면 결과적으로 불량 기업은 도태되고 우량 기업들만 살아남게 된다. 상품과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이 우량 제품을 키워내게 된다. 가정주부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 수준과 선택이 바로 경제 성장과 발전을 좌우하는 핵심 에너지인 것이다.
국권을 찬탈당하고 온 국민이 식민의 노예로 전락한 을사년의 악몽을 재연해서는 안 된다. 120년 전 을사년의 치욕도 따지고 보면 정치 불안에 기인한 측면이 없지 않다.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면서 화를 자초한 것도 큰 실수였다. 눈앞의 이익에 국론은 사분오열 갈라졌다. 지금 우리는 또 한번의 위기를 맞고 있다. 오이코노미아의 정신으로 함께 손잡고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깬 의식으로 눈을 부릅뜨고 국가신용 붕괴만은 막아야 한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