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는 영국이 똑같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말고 아랍인들에게도 비슷한 약속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국과 아랍인들의 거래는 후세인-맥마흔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영국의 이집트 주재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이 아랍의 정치지도자 알리 빈 후세인에게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월~1916년 3월 10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1차 대전에 아랍인들이 영국을 도와준 대가로 전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 후 맺어진 1917년의 벨푸어 선언은 맥마흔 선언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내용이다. 이 같은 영국의 모순된 외교정책은 훗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나아가 중동전의 씨앗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2000년 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아랍 민족은 뒤늦게 나온 벨푸어 선언에 망연자실했다.
베두인으로 불리는 아랍 유목민들이 시리아와 요르단, 팔레스타인에서 오스만 제국과 싸운 이유는 바로 독립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전사자 10만 명을 내면서까지 영국에 협조했던 베두인족은 뒤늦게 나온 벨푸어 선언에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은 유대와 아랍 어느 누구와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영국은 맥마흔 편지와 벨푸어 편지를 보내는 중에 프랑스와도 ‘전쟁이 끝나면 터키령 중동을 분할 통치한다’는 비밀협정을 맺었다. 이른바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실제로 1920년 중동 땅을 갈라 먹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이 끼어들기까지 중동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의 양분 구도가 이어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산 석유의 가능성을 주목해 반 식민통치 체계를 시도했다. 그 와중에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이 늘어나면서 아랍인들의 민족주의가 거세졌다. 영국이 지배하는 팔레스타인은 연일 아랍과 유대 민족 간 유혈 투쟁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당황한 영국은 유엔에 중재를 요청한 채 철수해 버렸다. 1947년 유엔이 이 지역을 분할할 것을 제안한 후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건국을 선포했다. 이튿날 인접한 아랍 국가들의 군대가 이 지역을 침공하면서 제1차 중동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9년 휴전 협정으로 이스라엘은 이전 위임통치 지역의 77%를 통제하게 되었다. 대다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자와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추방되거나 스스로 국가를 떠났다. 이를 아랍인들은 "나크바"라고 한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을 계속 받아들였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서안 지구, 가자 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을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그 점령지에 정착촌을 계속 확장해 왔다. 동예루살렘과 골란 고원을 사실상 병합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과 이란의 12일 전쟁과 미국의 이란 공습도 그 뿌리를 따지고 보면 맥마흔과 벨푸어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무책임한 외교가 참극을 부른 것이다.
팔레스타인 땅에 아랍 국가를 만들기로 한 맥마흔 선언을 뒤집고 아랍인 대신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도록 뒤늦게 보장한 벨푸어 선언은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의 공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엄청난 자금 지원에 영국이 뒤늦게 입장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돈의 힘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처럼 막강했다. 로스차일드는 독일 유대계 국제적 금융재벌 가문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마이어 암셀 로트실트가 가문의 시조다. 그는 5명의 아들들에게 사업을 분배해 맡겨 최초의 국제적 금융 은행을 설립한 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로스차일드가는 부를 쌓은 후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와 영국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로스차일드는 영어 발음이다. 독일어로는 로트실트, 프랑스어로는 로트실드로 부른다.
'로스차일드'라는 말은 독일어로 '붉은 방패'라는 뜻이다. 이 붉은 방패는 아직도 로스차일드가의 문장 한가운데에 박혀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에 그려져 있는 '5개의 화살을 쥐고 있는 주먹'은 바로 이 5명의 아들들을 상징적으로 그린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특히 나폴레옹 전쟁 때 큰돈을 벌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산업 스파이를 파견해 프랑크푸르트-파리-런던-빈-나폴리로 이어지는 정보망을 구축했다. 특히 런던에 파견돼 있었던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영국에 엄청난 규모의 금과 정보를 제공해 영국 정부의 신뢰를 쌓으며 정계 진입을 시도했다. 이 인연이 나중에 벨푸어 협정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의 하이라이트였다. 영국군과 프랑스 군대가 대격돌했다. 이 전투에 따라 차후 유럽의 판도가 갈릴 상황이었다. 유럽의 이목은 모두 이곳으로 쏠려 있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뛰어난 정보 수집망을 바탕으로 정부보다 무려 하루 이상 더 빨리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이 이겼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그는 이 귀중한 정보를 대중들에게 곧이곧대로 얘기하지 않고 역정보를 냈다. 영국군이 졌다고 거짓 정보를 퍼뜨린 것이다. 이 말을 믿은 금융가 사람들은 곧 그 가치가 폭락할 영국의 국채를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많은 수의 국채가 한꺼번에 매물로 나왔다. 영국의 국채값이 폭락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헐값에 나온 영국의 국채를 모두 사들였다. 그다음 날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전보를 전하면서 영국 국채 가격은 엄청나게 치솟기 시작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한꺼번에 2000%의 차익을 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일약 세계 최고의 금융 제국으로 올라선다. 이후 '로스차일드'는 사치와 부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예술품 수집, 궁전, 자선 사업으로 유명했다. 이 가문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영국이 아랍 민족을 배반한 이유는 두 가지다. 돈과 기술 때문이다.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유대 자본이 영국의 전쟁 공채를 사주지 않았다면 독일 동맹국들과 전쟁을 치르기 어려웠다. 포탄 제조에 들어가는 아세톤의 대량생산 기술을 유대인 과학자 하임 바이츠만이 갖고 있다는 점도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 배경이다. 바이츠만은 훗날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에 오른다.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 낸 로스차일드 제국은 지금도 커튼의 뒤쪽에서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