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부터 교수신문에서는 연말 기획으로 그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발표하고 있다. 이 사자성어는 해당 연도에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세간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각 해당 연도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는 주관 매체인 교수신문의 필진, 주요 일간지 칼럼 필진, 주요 학회장, 전국대학교수협의회장 등 전국의 대학교 교수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사자성어를 채택한다. 즉 우리나라의 대표적 지식인 집단이 본 한 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교수신문은 전국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지난해 11월 25일부터 12월 2일까지 이메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도량발호(跳梁跋扈)'가 41.4%(450표)를 득표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됐다고 12월 9일 밝혔다. 설문에 참가한 교수 1086명이 2024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로 '도량발호'를 꼽았다고 한다. 도량발호는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라는 뜻이다.
도량발호는 단일 사자성어가 아닌 '도량(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뛰어 다님)'과 '발호(권력이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뜀)' 등으로 각각 달리 쓰이던 고어가 붙어 만들어진 사자성어다. 도량발호를 선택한 교수들은 대통령 부부의 국정농단 의혹과 친인척 보호, 정부·기관장의 권력 남용, 검찰 독재, 굴욕적인 외교, 경제에 대한 몰이해와 국민의 삶에 대한 무관심, 명태균·도술인 등 사인에 의한 나라의 분열 등을 추천 사유로 꼽았다.
도량발호를 추천한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권력자는 국민의 삶을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는 데 권력을 선용해야 함에도 사적으로 남용하고 있다"며 "권력을 가진 자가 제멋대로 행동하며, 주변 사람들을 함부로 밟고 자기 패거리를 이끌고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추천 이유를 말했다.
권력자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권력은 일반적으로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을 일컫는다. 만약 해당 권력이 국가나 단체가 공인한 것이라면 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강한 권력은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권리와 힘이 크고 강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자들은 왜 자신에게 부여된 힘을 공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뛰게 되는가? 권력의 핵심은 ‘힘’이다. 소위 권력자들은 자신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기 쉽고, 자신의 힘을 확인해 보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즉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고,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같이 느낀다.
권력은 권위(權威)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권위(authority)’는 사전적인 의미로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 또는 어떤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威信)”을 말한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권위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다. 권위를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행동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권위의 핵심, 즉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이 점에서 권위는 두 가지로 나뉜다. 권위를 뜻하는 영어의 명사 ‘authority’는 두 개의 형용사로 분리된다. 하나는 우리말의 ‘권위 있는’과 같은 뜻의 ‘authoritative’다. 예를 들면 “저분은 국악에 권위가 있다”라든지 “김 박사가 이 분야에서 제일 권위 있는 분이야” 또는 “나는 이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고 싶어” 등과 같이 쓰이는 단어다. 이런 의미에서의 권위는 ‘어떤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을 뜻한다. 당연히 이런 권위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은 것이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만들 수 있다.
갑(甲)과 을(乙)이 어느 분야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할 때, 양쪽이 다 인정하는 그 방면의 권위자가 ‘결론’을 내리면, 양쪽이 다 수긍하고 논쟁에 따른 불필요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가정에서 부모가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 자녀들끼리의 갈등을 ‘한 말씀’ 해주시는 것으로 일거(一擧)에 해결할 수 있다. 반대로, 부모가 권위가 없을 때는 어느 자녀도 그 말을 따르지 않고 계속 갈등할 수밖에 없다.
더 큰 조직, 심지어 국가와 같이 큰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수없이 대립하는 많은 이해 당사자들이 서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투고 경쟁하는 곳이다. 동시에 많은 대립되는 의견들과 사상들이 서로 강하게 격돌하는 곳이기도 하다. 거의 같은 곳에서 같은 시간에 국가의 특정한 정책에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모아 ‘큰 목소리’를 내려고 아우성이다.
이런 경우에도, 만약 양측에서 다 인정하는 권위자가 있다면 갈등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큰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권위자의 ‘한 말씀’이 사태 해결에 훨씬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정치적 이슈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관망자들도 권위자의 판단을 따르게 되고, 그 판단에 따르지 않는 집단은 결국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되어 그 영향력을 잃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말의 ‘권위적인’에 해당하는 ‘authoritarian’이다. 예를 들면 “우리 사장님은 너무 권위적이야”라든지 “나는 그 사람의 권위적인 태도가 싫어” 등의 대화에서 쓰이는 의미다. 종종 ‘권위주의적 성격’이라는 말도 특정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이는 권위의 사전적 의미에서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 부정적으로 쓰일 때 사용된다. 이 힘이 잘못 사용되거나 나타나면 ‘반민주적’ ‘독재적’ 등의 의미와 유사하게 쓰이게 된다.
‘권위 있는’과 ‘권위주의적인’ 것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그것은 권위의 핵심인 ‘남을 움직이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 즉 힘의 원천(源泉)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힘은 크게 두 가지의 원천에서 나온다. 하나는 ‘능력’ 또는 ‘과제 수행력’에서 나온다. 만약 한 학자가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과 업적을 인정받는다면, 그는 그 방면에 ‘권위 있는’ 교수가 된다. ‘노벨상’이 고귀한 이유는 바로 그 상의 수상자가 전 세계적으로 ‘권위자’로 인정받게 된다는 점에 있다. 만약 제비뽑기로 수상자를 정한다면, 아무도 노벨상과 수상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힘의 원천은 ‘지위나 신분’이다. 다른 사람을 지휘하고 통솔할 수 있는 힘이 당사자의 지위나 신분에서 나온다면 이것은 ‘권위주의적’이 된다. 예를 들면, 종교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자신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분 즉 ‘승려’나 ‘목사’나 ‘신부’라는 신분에 의해 행사된다면 이들은 ‘권위주의적’인 종교 지도자가 된다. 권위주의적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과시하고 이용하려고 노력한다.
이 둘의 차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즐긴다. 왜냐하면, 능력은 다른 사람에게 베푼다고 해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면 줄수록 자신의 권위는 더 높아지고 영향력은 더욱더 커진다. 아랫사람들도 권위자를 존경하고 자신도 그렇게 되려는 ‘역할모델’로 삼기 때문에 관계가 친밀하고 상호 보완적이 된다. 당연히 그 관계는 민주적이고 화기애애(和氣靄靄)하게 된다.
반대로 ‘권위주의적’ 힘은 다른 사람과 나눌 수가 없다. 지위나 신분은 그 속성상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거나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통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유가 ‘사장’이라는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이 사람은 당연히 사장의 지위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노리는 것이 아닌지 항상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울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지위가 없어지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힘도 없어진다는 슬픈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랫사람도 단지 지위가 높다는 것 때문에 명령을 내리는 사실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불평이 싹튼다. 겉으로 드러나는 복종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호시탐탐(虎視耽耽) 그 자리를 빼앗을 기회를 노리게 된다.
권위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구태여 드러낼 필요가 없다. 아버지가 가정에서 역할을 잘 하는지 여부는 가족이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내가 아버지인데…”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자녀들이 이미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능력이 없는 아버지는 자주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내가 그래도 아버지인데, 너희들이 어떻게 내 말을 안 들을 수 있니?” 자녀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이미 자녀들이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자주 나타낼수록, 그는 권위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자신의 무능력을 널리 알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타인을 다룰 수 있는 ‘힘’ 그 자체는 이롭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힘이 주어진 책무를 잘 할 수 있는 능력과 과제 수행력에 기인해야 한다. 이런 권력과 권위는 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므로 계속 유지하고 조장해야 한다. 반면에 지위나 신분에 의해 획득되고 유지되는 권력과 권위는 배격해야 한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