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첨단 반도체 봉쇄를 우회하려는 중국이 레거시 칩 시장을 공격적으로 공략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중 간 반도체 전쟁이 첨단 칩을 넘어 레거시 칩 영역으로 확산되며 산업 전반의 지각변동이 예고된다고 지난 21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중국은 올해 웨이퍼 제조 장비 투자에 약 41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다. 이는 전년 대비 29% 증가한 수치로, 전 세계 투자액의 약 40%에 해당한다. 특히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SMIC는 2023년 자본 지출을 75억 달러까지 확대했는데, 이는 팬데믹 이전 연간 20억 달러 수준과 비교하면 급증세다.
중국의 전략은 태양광 산업에서 성공을 거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대규모 국가 지원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인 투자와 가격 정책으로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것이다. 번스타인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 파운드리 업체들의 성숙 노드 시장 점유율은 2017년 14%에서 2023년 18%로 증가했으며, 중국 내수 시장에서는 53%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이미 중국의 공세로 인한 실질적 타격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부는 2023년 하반기부터 중국 업체들의 가격 경쟁으로 인해 성숙 공정 부문에서 매출 감소를 경험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중국 시장에서의 점유율 방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대응해 한국 정부는 K-칩스 법안을 통해 세제 혜택과 R&D 지원을 확대하고, 용인과 평택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가속화하는 등 종합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탄핵 등 정치적 교착 상태로 인한 반도체 지원법 처리 지연이 산업 대응을 더디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소부장 육성, 전문인력 양성, 수요-공급 기업 간 협력 생태계 구축 등 시급한 산업경쟁력 강화 정책이 표류하고 있어 중국의 추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2025년 트럼프 재집권으로 미·중 갈등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트럼프는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 부과 강화와 기술 규제 확대를 예고했으며, 중국은 이에 대응해 희토류 등 핵심 광물의 수출 제한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새로운 불확실성을 야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반도체 전쟁의 레거시 칩 확전은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판도를 크게 바꿀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의 기술 봉쇄 전략은 한계에 직면할 수 있으며, 오히려 기술 수준에 따른 새로운 글로벌 분업 구조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첨단 공정에서의 기술 우위 유지와 함께 성숙 공정에서의 원가 경쟁력 확보라는 이중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과감한 지원 정책과 함께 기업들의 기술 혁신, 생산성 향상, 공급망 다변화 등 종합적인 대응 전략이 시급히 요구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