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호 진단] "국가신용등급 조정" 무디스의 경고…IMF 외환위기와 윤석열 계엄령
지금으로부터 꼭 27년 전인 1997년 10월 24일 미국 워싱턴에서 특파원으로 뛰던 시절이었다. 뉴욕증시의 신용평가회사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한 단계 강등했다는 보도자료를 보내왔다. 당시 한국 경제는 한보 부도와 기아 분규 사태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정치 상황도 어수선했다. 무디스의 신용 강등은 한국 상황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특파원들은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해 서울 본사에 무디스 신용 강등 소식을 긴급 타전했다. 호외를 찍거나 최소한 윤전기를 멈추어 판갈이를 할 것으로 보고 서둘렀다. 서울 본사 데스크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까짓 신용평가 강등 소식을 보도하려고 윤전기를 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워싱턴발 무디스 신용 강등 기사는 한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큰 오산이었다. 무디스의 신용 강등 소식이 나오자 국제 투자자들은 한국 관련 상품에서 돈을 빼내기 시작했다. 이른바 코리아 엑소더스가 온 것이다. 무디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2월 22일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투기등급인 B+로 떨어뜨렸다. 한국 경제는 결국 부도 위기에 처했다. 무디스의 신용등급 하향 조정을 무시한 대가는 실로 컸다.
IMF 외환위기 이전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은 상당히 양호한 수준이었다. 1997년 초만 해도 한국의 신용등급은 AA-(S&P 기준)로, 선진국 수준에 근접해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본격화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부도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원화 가치의 폭락이었다. 1997년 초만 해도 달러당 8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이 연말에 1960원까지 치솟았다. 원화 가치가 반토막 난 것이다. 이는 한국의 대외채무 부담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외환보유고 고갈 우려를 낳았다. 외환보유고 고갈은 곧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졌다. 신용등급 하락은 한국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해외 차입 비용이 급격히 상승했다. 투자 부적격 등급으로 추락하면서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훨씬 높은 이자율을 감수해야만 했다. 뉴욕의 금융기관들은 아예 한국에 대한 대출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는 외화유동성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외국인 투자자금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글로벌 투자기관들은 내규상 투자 부적격 국가에 대한 투자를 금지하고 있다. 한국의 신용등급이 투자 부적격으로 떨어지자 이들은 앞다퉈 한국 시장에서 빠져나갔다. 이는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의 폭락으로 이어졌다. 원화 가치 하락을 더욱 가속화했다.
국가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입었다. '투자 부적격 국가'라는 낙인은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렸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를 넘어 외교·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신용등급 하락의 여파는 장기간 지속되었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신용등급 회복을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S&P 기준으로 한국이 투자 적격 등급을 회복한 것은 1999년 1월이었다. 위기 이전 수준인 AA-를 되찾은 것은 2005년 7월이었다. 정상 회복에 무려 7년 8개월이 걸렸다.
한국 경제는 엄청난 구조조정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IMF의 요구에 따라 고금리·긴축재정 정책을 실시했고, 기업과 금융기관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고, 실업률이 급증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길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쳐흘렀다. 이는 모두 신용등급 회복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요즘 우리나라 원화 환율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계엄령 선포와 해제 그리고 탄핵 투표 등을 거치면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정국이 펼쳐지면서 원화 가치가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비상계엄령 선포 때 원화 환율은 1442원까지 뛰었다.
1997년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떨어뜨릴 때 당시 우리나라 원화 환율이 바로 1400원이었다. 1200원대 환율이 1400원 선으로 오르자 무디스가 한국 경제에 비상등을 켰던 것이다. 이 사태 이후 오랫동안 한국 경제계에서는 환율 1400원을 국가 부도로 가는 위험의 마지노선으로 보아왔다.
지금의 경제 상황과 주변 여건이 27년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을 감안할 때 환율 1400원을 무조건 부도 위기 시작의 신호탄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최근의 원화 환율 상승에는 '트럼프 효과'라는 돌발적 변수도 많이 반영돼 있는 만큼 1997년 경제위기의 재발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4156억 달러 상당의 외환보유액을 보유하고 있다. 보유 외환이 39억 달러에 불과했던 1997년보다는 외환위기를 막을 수 있는 보유 실탄에 상당한 여유가 있다.
그렇다고 여유작작할 상황도 아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한국의 정치적 긴장으로 경제에 지장을 초래하는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국가신용도와 해외 투자자들의 원화 자산 선호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무디스레이팅스는 "아직은 경제·금융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사임 또는 탄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치 환경은 여전히 불확실성에 휩싸여 있다"며 "많은 활동가들과 노동조합이 파업을 벌이고 있으며, 정치적 긴장이 고조돼 조업 중단 등 경제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상황이 장기화되면 신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무디스는 "정치적 여파가 장기화되면 예산안과 같은 중요한 법안을 효과적으로 통과시키거나 경제 성장 둔화, 어려운 지정학적 환경, 인구 고령화로 인한 구조적 제약 등 수많은 과제를 해결하는 정부의 능력에 부담을 줄 수 있다"며 "정치적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이미 약세를 보이는 기업과 소비자 신뢰가 약화될 경우 내수에 부담을 주고 경제 성장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한국 자산에 대한 투자자들의 선호도를 떨어뜨려 금융시장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짚었다.
무디스는 "차기 대통령 후보의 성향과 의회 구성, 특히 미국·중국과의 지정학적 관계, 반도체 부문에 대한 투자 전망, 재정정책에 미치는 영향 등에 따라 신용도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무디스는 "계엄령 선포·해제 이후 재정·통화정책 대응이 신속히 이뤄졌다"며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 기획재정부 등의 조치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계엄령이 신속하게 해제된 것은 제도적 강고함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하는 한국의 강력한 법치주의를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무디스는 한국 국가신용등급으로 'Aa2/안정적'을 부여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도 "정치적 위기가 장기화되거나 지속적인 정치적 분열로 정책 결정의 효율성, 경제적 성과 또는 재정이 약화될 경우 신용 하방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국 경제의 운명이 윤석열 비상계엄 선포로 야기된 탄핵 정국을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