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시즌이 끝나면 실내 경기인 프로 배구와 농구가 활성화된다. 그리고 시즌 끝과 더불어 은퇴로 경기장을 떠나는 선수들이 발표된다. 그 은퇴 모습을 보면 그 선수가 얼마나 성실하게 경기를 했는지 거의 판가름이 난다. 올해에 은퇴한 프로 선수들 중 필자에 눈에 띄는 선수는 여자배구 정대영 선수와 프로야구의 추신수 선수다. 두 선수 모두 성공적인 현역 시절을 마감하고 팬들과 구단의 칭송을 받으며 정든 경기장을 떠났다.
여자배구의 정대영 선수는 여러 면에서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된다. 먼저 현재 43세로 여자배구의 전설인 그는 25년의 현역 선수 생활을 마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9년에 실업팀에서 실업배구를 시작한 그는 특히 여자배구 프로리그에서 19년 동안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면서 네 번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선수 경력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프로 출범 첫해인 지난 2005년 득점상과 블로킹상, 수비상에 정규리그 MVP(최우수선수)까지 휩쓸며 레전드의 탄생을 예고했던 그는 지난 시즌까지 V-리그 통산 19시즌 523경기 1968세트 출전, 5653득점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2007-2008 시즌에는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했다. 그리고 런던 올림픽 4강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강산이 두 번 반 바뀌는 긴 세월 동안 현역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뼈를 깎는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여자 선수로서 결혼과 출산을 하면서도 냉엄한 프로 세계에서 25년의 세월 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다는 것은 본인의 노력이 무엇보다 컸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준다. 특히 정대영은 여자 배구선수 최초로 출산 휴가를 받고 복귀한 '엄마 선수'였다는 점도 한국 배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은퇴식에서 그 역시 "솔직히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저는 구단에서 도움을 많이 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다른 선수들도 저를 보고 그렇게(출산 후에도 선수로 복귀)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친구들도 계속 뛰고 싶다는 목표가 있다면 꼭 다시 복귀했으면 좋겠다. 그런 선수들이 많아져야 배구계 분위기도 바뀌고 선수층도 두꺼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소신을 전했다. 신체적으로나 생리적으로 여자 선수가 출산 후 전성기의 몸 상태로 다시 돌아와 계속 주전으로 활약한다는 것은 단순히 쉽지 않은 일만은 아니다. 본인은 겸손하게 구단에서 도움을 주어 가능했다고 말하지만 거의 초인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한 경력을 떠나서 그가 출산 후 다시 코트로 돌아와 주전으로 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앞으로 두고두고 후배 여자선수들에게 큰 꿈을 줄 수 있는 선수로 남을 것이다.
또 한 명의 영웅은 금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24년 프로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프로야구의 추신수 선수다. 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한 그는 2000년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투수로 18이닝 32탈삼진과 5실점을 기록하며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이때의 활약을 발판으로 2001년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했다. 투수가 아닌 타자로 전향한 후 2005년 4월 21일 매리너스 유니폼을 입고 MLB에 데뷔했다. 2006년 기회를 찾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현 가디언스)로 옮겼고 그곳에서 잠재력을 발휘했다. 2009년과 2010년 두 시즌 연속 20홈런과 20도루 이상을 기록하며 MLB 정상급 외야수로 자리매김했다. 3할에 가까운 타율, 출루율, 장타율을 동시에 갖춘 ‘5툴 플레이어(five-tool player)’라는 평가를 받으며, 인디언스 팬들에게 ‘추추 트레인’이란 애칭으로 사랑을 받았다. 2013년 신시내티 레즈로 다시 팀을 옮긴 뒤 21홈런-20도루-100볼넷-100득점을 기록하면서 선수 경력 절정을 맛봤다. 이후 텍사스 레인저스와 FA(자유계약) 선수로 7년 1억3000만 달러라는 당시 아시아 선수 중 역대 최고액 계약을 따냈다. 2018년 52경기 연속 출루라는 대기록과 더불어 한국인 타자 최초 MLB 올스타로 뽑히고 올스타전에서도 안타를 때렸다. 2020년까지 MLB 무대를 누비며 1652경기 타율 0.275, 1671안타, 218홈런, 782타점, 157도루라는 준수한 기록을 남겼다.
2021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SSG에 입단해 중심 타자로서 팀을 이끌며 2022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도달했다. 그는 “선수로서 우승을 할 수 있어 가장 기쁘다.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올해 그는 주장을 맡았고 어깨 부상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팀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며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 두 선수를 비교적 자세히 소개한 이유는 고령화 시대를 맞이한 현재 운동선수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전문직보다 몸을 주로 사용하는 운동선수는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못하다. 하지만 성실한 훈련과 수도자 못지않은 절제를 갖춘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운동선수도 관리만 잘하면 얼마든지 오랫동안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전에는 프로의 세계에서는 나이 30세만 넘어도 고참으로 취급되고 떠밀리듯이 은퇴를 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수 생활을 길게 하려고 절제와 훈련에 매진할 동기를 가지기 어려웠다. 하지만 고령화 시대의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수명이 길어지고 있다. 예전만 하더라도 대부분 30대 초중반, 이르면 20대 후반에 현역 생활을 접었었다. 하지만 지금 프로선수들은 철저한 자기 관리와 의학의 발달, 체계적 트레이닝을 통해 훈련이 과학화되면서 나이가 들어도 체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렇게 선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체계적인 훈련과 의학적인 도움이 있다고 해도 장수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조건은 선수 자신의 인간적 성숙함이다. 서울을 연고지로 하는 명문 구단의 주장까지 역임하면서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달성했고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위원 등으로 활동한 한 유명 선수는 마약 투약으로 구속되면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본인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팀 후배 선수들에게 의료용 마약류를 처방받게 한 뒤 수수하여 후배들의 경력에도 큰 손실을 입히고 말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대영 선수의 은퇴식장에는 같은 배구선수의 길을 걷고 있는 딸이 나와 어머니의 은퇴식을 빛내 주었다. 이 자리에서 딸은 역시 엄마를 향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그는 "선수로서 엄마는 제 롤모델이기도 하다. 배울 점도 많고, 엄마처럼 오래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고 밝혔다. 딸에게 롤모델이 된다는 것은 어머니로서 성공한 것이 아닐까? 어머니의 평에 따르면, "딸이 배구를 늦게 시작한 편인데 또래 친구들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정말 열심히 훈련한다. 그렇게 힘들게 운동을 하고도 집에 들어와선 내색을 전혀 안 한다. 나 때와는 다르게 요즘 친구들은 공부도 병행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힘든 길인데 잘 따라와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들 모녀 관계를 보면 정대영 선수는 운동선수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또 어머니로서도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추신수 선수는 은퇴식에서 “‘저 선수는 야구에 진심이었다. 야구 하나에 목숨 걸었던 선수’라고 기억되고 싶다. 다음 생에 태어나도 야구를 하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적수공권으로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진출하여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면서 성실하게 훈련을 거듭한 그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메이저리그 통산 아시아 선수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 새벽까지 경기를 봐주시고 응원해준 팬들께 너무 감사하다.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좋은 추억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야구를 시작한 9살 때부터 마지막 타석까지 되짚어보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하고 싶은 야구를 할 수 있었고,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점수를 매기기보다는 스스로 잘해냈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역에서 진심을 다해 성실하게 매진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성숙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정대영은 은퇴 이후 인생 제2막에 대해 "지도자 공부를 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유소년부터 시작할 것 같다. GS칼텍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면 (반갑게 응하겠다)"며 밝게 웃었다. 이제 지도자로서 정대영 선수를 볼 수 있는 즐거움을 기대하게 되었다.
운동 외에도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영역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모범적인 삶을 보여주는 귀한 분들이 많이 있다. 104세의 고령임에도 강의와 집필로 삶의 진수를 알려주고 계시는 김형석 원로교수를 비롯해 연극계에는 80이 넘은 고령에도 뛰어난 연기와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분들이 계신다. 88세의 신구 님과 84세의 박근형 님 그리고 81세의 박정자 님이 출연하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지난해 12월 19일 국립극장 50회 공연에서 전석 매진과 전석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후 일부 배우를 바꿔 진행된 아홉 개 지역의 공연에서도 전석 매진을 기록하더니 4월 26일부터 시작된 국립극장에서의 앙코르 공연도 전석 매진과 전석 기립박수라는 기록을 세우고 5월 5일 끝났다. 처음부터 모든 공연을 소화한 신구 님과 박근형 원로 배우는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로 매 공연을 거듭할수록 더 신나고 에너지가 생긴다며 새로 합류한 배우들과 더 좋은 무대를 선보이겠다는 각오를 현실화했다. 이분들의 삶은 고령화 시대를 맞아 새롭게 인생을 설계해야 하는 후배들에게는 큰 귀감이 되고 있다. 고령화 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열정과 성숙함이 고령화 시대에 필요한 자산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