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한·이 수교 140주년 기념, 아시아 지역 최대 규모 카라바조 전시회 개막 행사에 참석했다. 유럽의 남쪽 이탈리아의 화가들을 초청한 한가람미술관까지 북유럽 노르웨이의 ‘에드바르 뭉크’ 展의 열기가 번져왔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너온 전시 열풍은 때아닌 관객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 삐뚤빼뚤한 진주에서 아름다움을 얻거나 투박한 욕쟁이 할머니에게서 인정을 얻듯 바로크 화가들의 저항적 걸작들은 길게 오래 뜨겁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전주의 화가 니콜라 푸생(Nicholas Poussin)은 카라바조가 ‘회화를 파괴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곱게 낙인찍었다. 바로크 화가들의 작품을 만나면서 꿈틀대는 기운이 감지되었다.
11월 9일(토)부터 내년 3월 27일(목)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2층)에서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The master of light Caravaggio & his descendants)이 전시되고 있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는 유럽의 유명한 자연주의 화가이다. ㈜액츠매니지먼트 주최·주관, 문화체육관광부·주한이탈리아대사관·주한이탈리아문화원·이탈리아관광청·주한이탈리아상공회의소 후원, 불가리·람보르기니 협찬, 기술보증기금 제작지원의 전시회에는 바로크 미술의 창시자 카라바조 작품 10점(우피치 미술관 소장품 3점 포함), 루도비코 카라치, 페데 갈리치아, 구에르치노 등 동시대 거장의 작품 47점, 총 57점이 전시되고 있다.
카라바조는 16세기 후반부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여 17세기 초반에 절정의 화가로 칭송받는다. 그가 생존했던 39년 동안, 집중적 화작(畵作) 연한은 이십여 년, 그는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화가였기에 사후에 더욱 유명해졌다. 카라바조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작품을 보면서 조선시대 선조 시기 화가들을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바로크 회화는 16세기 말 로마에서 탄생하여 17세기 유럽으로 전개되었다. 로코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수많은 미술가가 천장화와 성당 장식에 매달렸다. 감각적인 내용과 감정적 상태를 소지한 극적 작품들이 생산되었다. 회화는 건축·조각과 장식적인 통일을 이루며 환상적인 내용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카라바조를 3대 천재 화가라 한다. 한국에서 카라바조의 작품은 아시아 전시 최대 규모인 10점이다. 카라바조는 20세기에 들어 활발하게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대비한 테네브리즘(Tenebrism)의 창시자, 사실주의 기법 최초 구사, 바로크 예술사와 현대예술의 시작을 알렸다. 17세기의 카라바조畵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역동적인 구도와 극적 표현의 주제는 눈앞의 현실처럼 보였고, 가톨릭교회가 직면한 반종교개혁 정신과 맞물려 교회와 서민들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화풍은 바로크 예술의 거장인 루벤스, 렘브란트, 조르주 드라 투르, 벨라스케스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외 반출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카라바조의 작품 한국으로의 공수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전시는 카라바조가 13세에 롬바르디아 수련시대, 20대 얻은 명성의 로마와 나폴리 시기, 살인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39세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따라 6개의 섹션으로 나뉘어졌다. 우피치 미술관 소장품 3점 <묵상하는 성 프란체스코>,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등 카라바조의 대표작들이 이번 전시를 위해 서울을 찾아왔다. 이탈리아에서 최고 권위의 우피치 미술관 소장품 <그리스도의 체포>, <성 토마스의 의심>, <이 뽑는 사람> 세 점은 한국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카라바조의 전 작품은 백여 점이다.
밀라노 출생(1571년 9월 29일)의 카라바조는 다섯 살 때 흑사병으로 조부, 아버지, 형제를 잃었다. 카라바조는 열세 살에 티치아노의 제자이자 조르조네 화풍을 밀라노에 소개한 시모네 페테르차노와 도제 계약을 맺고 그의 작업실에서 4년간 수련했다. 20대(1595년)에 로마에 진출한 카라바조는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는다. 프란체스코 추기경의 후원으로 그의 궁에서 지내며 <점쟁이>, <루트 연주자>, <악사들>, <메두사>, <바쿠스> 같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카라바조의 전성기를 알린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성 마태오의 소명>과 <성 마태오의 순교>를 시작으로 그는 종교화, 정물화, 인물화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며 컬렉터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체포>, c. 1602, 패널 위 캔버스에 유채, 135 x 168cm. 로마의 중요한 후원자 마테이(Mattei) 가문의 궁전 장식용 그림이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본디오 빌라도 총독의 로마 병사들에게 체포되는 순간이다. 오른쪽 위에서 등불을 들고 체포 장면을 바라보는 이는 복음서의 말쿠스로 추측되며 카라바조 자신의 자화상으로 추정된다. 왼쪽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고통을 토하는 인물은 성 요한이다. 전경의 병사의 망토, 튜닉, 바지의 세 가지 주황색 계열의 붉은색은 카라바조의 로마 시기 작품 특유의 벽돌색이다.
<성 토마스의 의심>, c. 1601~1602, 캔버스에 유채, 108 x 146cm. 카라바조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복제되었으며 묘사적 효과의 정점을 보여준다. 토마스 사도의 검지가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를 깊이 파고드는 장면은 충격적이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아폴론적인 완벽함을 지닌 그리스도의 신체와 서민적인 풍모의 사도들, 놀라움에 가득 찬 그들의 시선을 대조시키는 이 장면은 가톨릭 종교개혁의 포교 상징이다. 카라바조는 영적인 존재가 아닌, 육체와 피로 이뤄진 인간 그리스도를 그려내며 부활의 증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카라바조는 실체적 증거만이 확인할 수 있다는 사고에 동조하며 ‘자연적 경험’을 중시하는 갈릴레오의 신과학 원칙에 동조한다.
<이 뽑는 사람>, c. 1608~1610, 캔버스에 유채, 139.5 x 194.5cm. 이 작품의 객관적이고 잔인한 묘사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라는 거대한 벽을 보고 자란 젊은 화가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들은 안니발레 카라치의 안도감을 주는 캔버스에도 매료되어 있었다. <묵상하는 성 프란체스코>, c. 1603, 캔버스에 유채, 136 x 91cm. 카라바조가 로마의 마테이 가문의 궁전을 위해 그린 작품이다. 이후의 두 가지 버전은 로마의 바르베리니 궁전과 비미날레 궁전(현 이탈리아 내무부 청사)에 전시되어 있다. 두 손에 해골을 들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성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담는다. 고독한 형상은 신성한 빛에 휩싸여 은둔지의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듯한 인상이다. 갈색 계열로 단순화된 색조는 프란체스코의 얼굴, 해골, 바위 위에 놓인 십자가를 비추는 강렬한 빛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c. 1606, 캔버스에 유채, 119.5 × 94.5cm. 보르게세 추기경이 의뢰한 전시작은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의 카라바조파 작품 복원 대가인 브루노 아르치프레테의 작업실에서 정밀 복원되었으며 카라바조의 독창적인 작업 방식이 확인되었다. 베들레헴의 젊은 목동 다윗과 블레셋의 용사 거인 골리앗 사이의 결투에서 마지막 순간을 묘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의 징표로 내보인 골리앗이 자른 피 흐르는 머리는 카라바조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회화적 표현을 넘어 자신의 이미지를 내면에 투영하였다. 이 처참한 상징으로 작가는 자신의 죄, 다윗의 겸손함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교만이라는 치명적 결함을 자각하고 고백한다.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c. 1595, 캔버스에 유채, 65.5 x 50cm. 손톱이 더러운 곱슬머리 소년의 모습에서 카라바조의 모습이 떠오른다. 귀 뒤에 꽂은 흰 장미는 사랑의 열정을 상징하는 암시이다. 소년 앞에는 욕망과 관능적인 즐거움을 암시하는 짙은 붉은색의 체리가 높여 있다. 유리병 속에 보이는 장미와 재스민, 섬세하게 묘사된 장미 가시는 사랑의 고통을 연상시킨다. 피렌체의 로베르토 롱기 미술사 연구재단 소장 버전과 런던 내셔널 갤러리 버전은 유사한 구성이다. 런던 버전은 머리 모양, 표정, 뺨과 오른쪽 눈꺼풀 아래 고통의 눈물이 선명하지만, 피렌체 버전은 눈물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며, 런던 버전은 눈물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과일 속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도마뱀이 소년의 손을 물어 사랑의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는 장면은 르네상스 시기의 자주 다뤄지던 전형적인 모티프다. 이는 사랑의 신 큐피드가 제멋대로 연인을 희롱하며 화살, 독침, 가시, 도마뱀의 이빨로 그들을 상처 입힌다는 은유이다. 소년의 잔뜩 찌푸린 표정과 흐트러진 자세는 성적 쾌락에 몰두한 이들이 겪는 고통을 암시하며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성 세바스티아노>, c. 1606, 캔버스에 유채, 170 x 120cm, 성 세바스티아노와 두 집행인의 모습이다. 카라바조는 성 세바스티아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교 장면을 사실적으로 포착했다. 성 세바스티아노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를 전파한 죄로 순교하게 될 운명을 깨닫는 순간을 담아낸다. 두 집행인이 그의 손과 발을 나무에 묶고 있는 동안 첫 번째 화살이 그의 몸을 관통한다. 성인의 얼굴은 고통과 경악이 교차하며 일그러지고, 본능적으로 화살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첫 번째 화살을 쏜 집행인을 의도적으로 화면에 포함하지 않는다. 이 부재는 집행인이 화면 밖에 있는 관람자, ‘우리’이며 성 세바스티아노의 순교 집행자라는 점을 시사한다.
<성 야누아리우스의 참수>, c. 1606, 캔버스에 유채, 116.5 x 98cm.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야누아리우스. 단순해 보이지만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다. 그의 피는 두 개의 유리병에 보관되었다. 목에서 나온 피가 퍼지는 모습이 과장을 배제한다. <황홀경의 막달라 마리아)>, c. 1606, 캔버스에 유채, 95 x 75m. 세상의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고 눈물까지 흘리는 막달라 마리아, 세상의 짐을 풀어놓고 근심을 놓을 때 황홀경과 비슷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성 바오로의 회심>, 루도비코 카라치 作, c. 1587, 캔버스에 유채, 250 x 173cm. 1587년 볼로냐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있는 잠베카리 가문 예배당을 위해 제작된 작품,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루도비코는 장엄하게 일어선 말에서 떨어진 바울이 땅에 쓰러진 순간을 혁신적으로 구성, 이 구도는 17세기 자연주의의 선구적 작품이 되었다. 이 장면은 이후 카라바조가 제작한 <사도 바울의 회심> 첫 번째 버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불과 몇 년 후, 카라바조는 루도비코의 이러한 혁신적 구성 방식을 자신만의 독창적 해석으로 재창조하며,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관객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장면을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전시작은 루도비코가 제작한 첫 번째 버전으로 이후 기병과 기사들이 추가되며 장면이 더욱 완성된 형태로 발전되었다.
<배가 있는 정물화>, 페데 갈리치아 作, c. 1605, 패널 위 종이에 유채, 24 x 41cm. 카라바조와 동시대 작가 페데 갈리치아는 미니어처 작업가 아버지 눈치오의 밑에서 예술적 감각을 키워나갔다. 그녀는 정물화에 섬세하고 정교했으며 과일 묘사에 남다른 기교가 있었다. 그녀는 초상화와 종교화에도 재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녀의 대표작 <배가 있는 정물화>은 단순한 배경에 열두 개의 배가 다양한 방식과 구도로 배치된다. 과일들은 극도로 정밀하고 우아하게 묘사되었으며, 부드러운 색조와 섬세한 명암 표현을 통해 입체감과 질감이 돋보인다. 배의 미세한 흠집마저도 자연스러운 친밀감으로 표현되어 갈라치아가 보여준 내밀한 자연주의적 시각을 한층 강조한다.
<다친 탄크레디를 발견한 에르미니아>, 구에르치노 作, c. 1619, 캔버스에 유채, 155.4 x 178cm. 안티오키아의 공주 에르미니아가 생동감 있게 묘사된다. 그녀는 타소의 서사시 『예루살렘의 해방』에 등장하는 반영웅으로 적군 기사 탄크레디를 향한 사랑과 애국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구에르치노는 전투에서 다친 탄크레디를 어머니에게 배운 의술로 치료하는 공주의 모습을 그렸다. 사랑하는 이에게 헌신하는 에르미니아의 자세에서 긴장감이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진홍 황토 진청의 옷자락이 그녀의 몸짓을 따라 격렬하게 흩날리고 극적인 순간을 더욱 강조한다. 탄크레디 옆에서 간호하는 공주의 모습이 자연주의적 명암법으로 정교하게 표현된다.
작가로서 카라바조의 마지막 후반은 암흑기였다. 불안정한 삶은 끊임없이 범죄와 비행으로 얼룩졌다. 1606년 실내 테니스 경기 도중 살인을 저지르며 사형선고를 받고 로마에서 도망자가 되었다. 이후 카라바조는 나폴리, 몰타, 메시나, 시칠리아 등을 떠돌며 교황의 사면을 기다렸다. 카라바조는 도망자 신세로 4년을 보낸 뒤, 포르토 에르콜레에서 1610년 7월 18일 사망했다.
이번 전시는 ㈜액츠매니지먼트(대표 김민희, 이사 안지형)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카라바조의 걸작들과 동시대 자연주의적 회화 개혁을 함께한 거장들의 작품을 만나며 카라바조의 예술 창작 정신과 그의 예술적 유산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카르바조 탄생 453년을 맞아 바로크 예술의 혁명적 기운이 한국에 일어서 다시 빛을 보고 있다. 푸른 용띠의 가을에서 푸른 뱀띠의 봄까지 카르바조의 예술적 열정을 읽을 수 있는 전시는 이어진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사진제공 ㈜액츠매니지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