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세상이다. 찬비 내리더니 거리는 온통 낙엽의 물결이다. 11월이 되어도 푸른 빛을 버리지 못했던 가로변의 은행잎들이 어느새 노랑나비 떼가 되어 바람에 몸을 던지고 느티나무·벚나무·플라타너스 낙엽들이 어지러이 거리를 덮고 있다. 곱게 물든 단풍잎을 책갈피에 갈무리하던 가을의 낭만을 떠올릴 틈도 없이 낙엽을 쓰는 청소부들의 손길만 분주하다. 이렇게 바람 불고 낙엽이 어지럽게 날리는 날이면 까닭도 없이 정처 없는 나그네처럼 걷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나는 단풍나무와 신나무가 곱게 물든 잎을 페르시안 카펫처럼 깔아놓은 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걷다가 숲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문득 숲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 않은 좁은 오솔길은 발목이 빠질 정도로 낙엽이 켜켜이 쌓여 있다. 길 위에 쌓인 낙엽을 밟으며 가랑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참나무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걷다가 빽빽이 들어선 참나무 숲에 홀로 붉은 단풍나무를 보며 당나라 시인 두목의 ‘산행(山行)’이란 시를 떠올렸다. “遠上寒山石徑斜(원상한산석경사) 멀리 늦가을 산을 오르니 돌길 비껴 있고/ 白雲生處有人家(백운생처유인가) 흰 구름 피어나는 곳에 인가가 보인다/ 停車坐愛楓林晩(정거좌애풍림만) 수레를 세우고 앉아 늦은 단풍 숲을 즐기니/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 서리 맞은 단풍잎이 이월 봄꽃보다 붉어라.” 가을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다운 건 잠깐이다. 꽃 지듯 단풍의 시간 역시 짧다. 갈색(褐色)을 ‘갈 때가 된 색’이라 하던 친구의 농담처럼 울긋불긋 곱게 물들었던 잎들이 곧 칙칙한 갈색으로 변해 찬 바람에 바닥으로 내려앉기 때문이다.
겨울 채비를 하느라 쉼 없이 잎을 내려놓는 참나무 사이를 거닐며 문득 나무들도 따뜻한 겨울을 좋아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추운 겨울은 사람과 나무, 모두 견디기 힘든 고난의 계절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나무들은 따뜻한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록수들은 날씨가 추우면 거의 광합성을 하지 못하다가 낮 기온이 올라가면 비로소 하게 되는데, 광합성을 한다는 것은 곧 증산 작용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겨울철 낮 기온은 금방 올라가지만, 뿌리 부분의 토양 온도는 쉽게 올라가지 않으므로 잎에서는 증산 작용으로 수분이 빠져나가는데 뿌리가 물을 흡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나무는 수분 부족 현상이 나타나 쇠약한 가지가 먼저 마르고, 끝내는 나무 전체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상록수에게는 겨울철 이상기온은 오히려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식물은 겨울 추위를 견디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잎을 떨구기 전에 잎 속에 있는 유용한 성분들을 몸속으로 이동시켜 춥고 긴 겨울을 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마치 농사꾼이 추수한 곡식을 창고에 갈무리하듯이. 식물도 춥고 긴 겨울을 준비하는 것이다. 엄살부터 피우는 사람들과 달리 묵묵히 겨울을 준비하는 숲을 산책하며 나의 겨울 채비를 생각하니 허술하기 그지없다. 언젠가 한 번 뿌리내리면 그곳이 어디든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나무를 안타까워하는 내게 나무는 굳이 이동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했던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한자리에 붙박이로 살아가는 나무들이 사람보다 지혜롭다는 사실을 나이 들수록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나무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잎을 떨구고 겹겹으로 겨울눈을 감싸서 보호하며 추운 겨울을 견디며 봄을 기다린다. 가을과 겨울이 갈마드는 이 시기가 지나고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 볼 게 없다고 투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초록의 잎도, 어여쁜 꽃도 없으니 투정이 나올 만도 하다. 하지만 체로금풍(體露金風)이란 말도 있지 않던가.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무성한 잎에 가려져 있던 나무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속삭이듯 낙엽 한 장이 내 어깨를 툭 치고 간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