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주의 최대 축제인 대통령 선거가 사상 유례없는 '자금 선거'로 치달으며, 민주주의 대표성 왜곡과 정치자금 투명성 약화, 사회 양극화 심화 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치자금 감시단체 오픈시크릿(OpenSecrets)에 따르면, 2024년 연방 선거 총지출 규모가 159억 달러(약 21.9조 원)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2020년 대선의 151억 달러를 크게 상회하는 금액이다.
악시오스와 CNN 등 주요 언론의 최신 보도에 따르면,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후보는 지난 7월 출마 선언 이후 3개월 만에 10억 달러의 모금 실적을 달성했다. 8월 한 달에만 3억6100만 달러를 모금할 정도로 돈이 몰렸다.
트럼프 측의 선거 모금은 해리스에 미치지 못하지만, 최근 당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돈이 몰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억만장자들의 '빅머니'가 대선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친트럼프 성향 슈퍼팩(Super PAC)에 7500만 달러를, 카지노 재벌 미리암 아델슨은 9500만 달러를 각각 투입했다. 운송업계 거물 리처드 유라인까지 포함해 이들 3인의 기부금만 2억2000만 달러에 달한다.
민주당 진영에서는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1900만 달러, 링크드인 공동창업자 리드 호프만이 1000만 달러를 각각 기부하며 해리스를 지원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민주당의 소액기부 비중이다. 민주당 후보 기부금의 28%가 200달러 미만 소액기부인 반면, 공화당은 19%에 그쳤다.
이러한 천문학적 선거자금의 유입은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상위 100명의 기부자가 전체 모금액의 16%를, 상위 1%가 50%를 차지하는 등 부유층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거대 자본가들의 대규모 기부 배경에는 법인세 감면, 규제 완화, 친기업 정책 등에 대한 기대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시절 법인세율은 35%에서 21%로 대폭 인하됐고, 환경·노동 규제도 크게 완화됐다.
이런 거대자본의 정치 개입에 대한 유권자의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 73%가 "거대자본의 정치자금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응답했다. 특히 젊은 층에서 "자본의 정치 장악" 비판이 거세다.
정치자금의 투명성 약화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슈퍼팩은 선거자금법상 후보자나 정당과 직접 협력이 금지되어 있지만, '독립지출'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무제한 모금과 지출이 가능하다. 친해리스 성향 '퓨처 포워드'와 친트럼프 성향 '프리저브 아메리카' 등 주요 슈퍼팩들은 비영리단체를 통한 우회 기부로 실제 기부자 추적이 어려운 실정이다.
예를 들어, 퓨처 포워드는 '퓨처 포워드 USA 액션'이라는 다크머니 비영리단체로부터 거액을 지원받고 있으며, 이 비영리단체는 기부자 명단을 공개할 의무가 없다. 이처럼 여러 단계를 거치는 우회 기부는 최초 자금 출처를 불투명하게 만들어 유권자들의 알 권리를 제한하고, 정치자금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약화한다는 지적이 계속된다. 결과적으로 이런 구조는 거대자본이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우회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거자금 격차는 의회 선거에서도 두드러진다. 상원에서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1억5000만 달러 이상을 더 지출했고, 하원 경선에서도 민주당 후보들이 평균적으로 더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자금 선거'가 지속되는 근본적 원인은 미국의 정치자금 제도에 있다. 2010년 연방대법원은 '시티즌스 유나이티드' 판결을 통해 기업의 정치자금 기부를 '표현의 자유'로 인정했다. 이후 슈퍼팩을 통한 무제한 기부가 가능해졌고, 이는 선거마다 정치자금 규모가 급증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현재 미 의회에는 정치자금 개혁 법안이 계류 중이나, 공화당의 반대로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거대자본의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서 근본적 개혁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번 대선은 미국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거대자본의 영향력 확대로 '한 표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대원칙이 위협받고 있으며, 양극화된 정치 지형 속에서 천문학적 선거자금이 사회 통합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결국, 이번 대선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걸린 중대 승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자본의 영향력을 적정 수준으로 제한하면서 민주주의 본연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을지 미국 사회의 지혜가 시험대에 올랐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