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등 대기업 총수들이 탄핵 정국 이후 미국·중국·일본 등 한국 경제와 밀접한 국가들을 대상으로 민간 경제외교 사절 역할을 더욱 강화하고 나섰다. 한국 정부가 '계엄-탄핵'이라는 돌발 악재를 겪으면서 사실상 권력 공백 상태에 처하자 이들 총수가 개인과 경제계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방어에 나선 것이다. 재계 총수가 민간 외교특사가 됐던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국내 정치 변수와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이 맞물려 재계 인사의 민간 외교관 역할이 더욱 부각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3일 재계에 따르면 탄핵 심판과 조기 대선으로 국내 정치의 불확실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재계 총수들의 민간 경제특사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탄핵 정국으로 대통령의 외교사절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탄핵 정국 이후 최 회장의 행보가 대표적이다. 최 회장은 22일 “최근 일련의 어려움에도 한국 경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며 위기 극복 의지를 담은 공식 서한을 128개국 상공회의소 회장과 116개국 주한 외국 대사를 대상으로 보냈다. 당장 내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 서밋’의 의장을 맡아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나선 것이다.
기업인의 개인적인 친분도 민간 외교특사 역할론에 힘을 실었다. 미국에서 트럼프 당선인이 두 번째 취임을 앞둔 것이 계기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김 회장은 트럼프의 측근인 에드윈 퓰너 헤리티지재단 창립자와 40년 넘게 인연을 이어왔다. 그는 2017년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때도 한국 재계 인사 중 유일하게 초청받았다.
트럼프 당선인의 장남인 트럼프 주니어와 오랜 친분을 쌓은 정 회장도 주목받았다. 그는 최근 트럼프 주니어의 초청으로 한국 재계 인사들 중 처음으로 트럼프 당선인을 만났다. 정 회장은 당시 초청 자리에 대해 “(트럼프 당선인과 주변 인사들에게) ‘대한민국은 저력 있는 나라니까 믿고 기다려 달라. 빨리 정상으로 찾아올 것’ 그 얘기까지만 했다”고 언급했다.
재계는 앞으로도 기업인과 경제단체 등 재계 인사들의 민간 외교특사 역할이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이후에도 기업인들의 민간 경제특사 역할론이 더욱 필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 외교특사 역할을 맡으며 주목받은 바 있다. 앞으로는 이러한 역할이 더욱 부각될 것이라는 것이다.
박남규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삼성과 SK 등 한국의 5대 그룹은 미국에 자체 싱크탱크를 갖추는 등 스스로 해외 대관 활동을 해나갈 능력을 갖춘 반면, 그러지 못한 나머지 기업들은 정부의 통상외교가 없으면 스스로 대응이 쉽지 않다”며 “(정부 통상외교가 쉽지 않은 지금) 미국이나 일본, 유럽연합(EU) 같은 주요 국가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한 경제단체들이 가교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전에는 재계 인사들이 글로벌 네트워크를 풍부하게 보유했지만 그 중요성이 정치권의 외교 활동에 가려진 것이 사실”며 “정 회장의 트럼프 면담은 한국 기업인들이 민간 경제외교 사절 역할을 주도하는 트렌드가 시작되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류진 풍산그룹 회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식에 초청받았다. 류 회장이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경제인협회는 내년 1월 20일 예정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식에 초청받았다는 사실을 이날 공개했다. 국내 재계인사중 취임식에 초청받은 사실을 밝힌 것은 류 회장이 처음이다.
정승현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rn72benec@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