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NYT)는 이번 미국 대선에서 ‘다크 머니(dark money)’와 ‘그레이 머니(gray money)’가 판을 뒤흔들었다고 진단했다. 또 다른 매체 액시오스는 “이번 선거전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억만장자들의 놀이터였다”고 평가했다.
다크 머니는 미국 재계의 큰손들이 비밀리에 지원하는 정치자금을 뜻한다. 다크 머니는 비영리 단체 등을 통해 익명으로 기부되는 정체불명의 자금이다. 다크 머니는 액수 제한이 없고, 투명성과 관련한 규제도 느슨해 사실상 금권선거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2010년 '시티즌 유나이티드 대 연방선거위원회(FEC) 판결'에서 비영리 단체 등을 통한 선거자금 모금에 대한 제한을 풀어줬다.
억만장자 기부자들이 다크 머니 조직인 슈퍼팩(Super PAC·정치행동위원회)에 기부하면 기부금 액수 제한을 받지 않으나 기부자의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 이때 슈퍼팩이 비영리 단체로 등록하면 기부자 개인이 아니라 그 돈을 낸 단체나 그룹만 공개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실제 기부자의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쳐 세탁된 돈이 그레이 머니다.
선거 막판에 이르면 민주당과 공화당이 모두 그레이 머니를 집중적으로 살포한다고 NYT가 지적했다. 연방선거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10월 1일부터 16일 사이에 슈퍼팩에 쏟아져 들어온 그레이 머니가 2억4000만 달러(약 3308억원)에 달했다. 민간 단체 ‘공정한 세금을 위한 미국인들(Americans for Tax Fairness)’에 따르면 이번 선거 사이클에 150명의 억만장자와 그 가족이 낸 기부금이 19억 달러(약 2조6180억원)에 달한다. 지난 2020년 선거 당시에 600명의 개인 기부자가 살포한 돈이 12억 달러였는데 4년 만에 약 58%가 증가했다고 이 단체가 밝혔다.
올해 대선에서는 미국 1위 부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트럼프 지원 활동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트럼프 지원 슈퍼팩에 최근까지 1억1800만 달러를 지원했고, 핵심 경합주에서 매일 유권자 1명을 뽑아 100만 달러를 나눠주는 이벤트를 계속하고 있다. 머스크와 트럼프는 정치와 경제의 경계를 허물고, 일심동체가 됐다.
억만장자란 순자산이 10억 달러(약 1조4000억원)를 넘는 사람들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억만장자들이 이번 선거 기간 최소 6억9500만 달러(약 9664억원)를 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두 후보가 모금한 총금액의 약 18%에 해당한다. 포브스가 선정한 약 800명의 미국 억만장자 중 18%인 144명이 자기 돈을 이용해 이번 대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FT는 “소수의 억만장자가 미국 대선의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짚었다. 지난달 중순까지 해리스 캠프와 슈퍼팩이 확보한 선거자금은 약 21억5000만 달러(약 3조원)이고, 이 가운데 약 6%인 3억9000만 달러가 억만장자들이 낸 것이다. 같은 기간 트럼프 캠프와 슈퍼팩은 약 16억8000만 달러(약 2조3300억원)를 모금했고, 이 중 40%가량을 억만장자들이 냈다.
정당과 후보자 입장에서 선거자금은 생사를 좌우하는 실탄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을 통해 정치와 돈의 도덕적 경계가 확실하게 허물어졌다. 미국 정치와 선거를 움직이는 힘이 정당과 후보자에서 점차 억만장자로 옮겨가고 있다.
정치인과 정당이 정치를 독점해서도 안 되지만, 억만장자가 돈의 힘으로 정치와 선거를 좌지우지하면 민주주의가 퇴보한다. 거꾸로 가는 미국 민주주의 현장은 한국에도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국기연 글로벌이코노믹 워싱턴 특파원 ku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