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9일(토) 저녁 여덟 시, 남산국악당에서 하나경 연출·안무의 「숨, 짓」(Flow and Flutter)이 공연되었다. 「숨, 짓」은 순조 때(1827년) 효명세자가 어머니 순원왕후의 탄신일을 맞아 올린 19종의 창작 정재 가운데 「박접무」(撲蝶舞)가 동인(動因)이다. 안무가는 ‘박접무’의 나비의 '숨'과 '짓'에 주목, 탄생 성장 고통 희망의 순간(瞬間)을 인간 삶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인간도 나비의 삶처럼 짧은 순간이 모여 ‘찬란함'을 이룰 수 있다. 안무가는 이러한 이치로 우리의 삶을 반추하며 일상의 소중함과 행복한 순간을 일깨운다.
앞은 넓고 뒤가 좁은 무대가 들어선다. 나비의 두 날개를 형상화한 검정과 하양의 경계선이 의미를 머금고 나비가 경계를 넘나든다. 경계는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 성장을 통해 나아가는 세상, 미지의 세계 등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 번쯤 고민하고 가보았으면 하는 ‘어떠한 곳’이 된다. 시작에 좁게 사용된 화이트 호리존의 뒷 막은 3장에서 환희의 의미로 넓게 활용된다. 나비의 변태(變態)처럼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위대한 찬란함을 이뤄내자, 대다수 사람은 여전히 그러한 이룸의 순간을 위해 희망을 품는다.
안무가 하나경은 봄을 예찬하는 궁중춤 「춘앵전」(春鶯囀),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박접무」(撲蝶舞) 가운데 행복 기원의 나비춤 ‘박접무’를 창작무용의 소재로 삼는다. 봄 춤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는 효명세자의 효심을 존중한다. 「숨, 짓」은 나비가 겹겹이 날아와 봄날의 정경을 음미하는 「박접무」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나비의 '숨'과 '짓'에 주목, ‘순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순간은 짧지만, 삶에 비추어 영원을 이루는 숭고한 현재이다. 하나경은 ‘숨’ 쉬고 ‘짓’하는 여러 순간이 쌓여 삶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사유한다.
조선시대의 정재는 춤 동작보다 노래나 구호가 내용을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의 궁중춤은 내재적 가치관과 격식을 반영하여 양식화를 추구했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궁중춤을 낯설게 여긴다. 궁중춤이지만, 관객을 곧바로 사로잡는 ‘박접무’는 세세한 부분까지 상징이 되었다. 춤의 시작과 더불어 무용수들은 나비의 날갯짓을 시작한다. 화려하고 커다란 호랑나비 문양, 기품의 모자, 오색 한삼에 우아한 동작이 나비를 상징한다. 하나경은 이런 효명세자의 봄의 정취를 현대식으로 만들어 객석까지 느낌이 스며들도록 만들었다.
하나경은 전통무용, 궁중무용 등의 원형적 사고를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미학적 작업을 선호한다. 무형에서 본질을 찾으려는 철학자의 모습을 보이며 일상의 소중한 사소한 것들을 창의적 사고에 담아 ‘전통춤의 현대화’를 지향한다. ‘박접무’의 내용, 표현, 창사(唱詞)는 안무가를 매료시켰고, 봄에 소생되는 모든 것에 나비처럼 환생의 의미를 담는다. 안무가 하나경에게 이런 모든 자연현상은 희망의 기호였다. 인간의 삶을 나비에 투영시켜 희망을 그려내는 일은 예술가의 위대한 사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안무가는 ‘예술성’과 ‘상업성’을 고려하면서 관객과 소통하는 작품을 선호한다. 나비가 되어 자유를 얻었지만, 누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의 삶이다. 탄생, 장구한 성장 기간, 변태의 순간 등을 인간 삶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나비의 날갯짓은 희망이며 성장 재생 자유 사랑 희망 등의 의미를 표현한다. 나비가 탄생하는 봄은 긍정적이고 밝은 생기(生氣)로 상징시킨다. 안무가는 「숨, 짓」의 중심체 나비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삶을 들여다본다. 환상적인 나비들의 ‘몸, 짓’은 현대회화의 일면을 보는 듯한 시각적 흥분을 일으켰다.
「숨, 짓」은 ‘미디어아트’와 ‘창사’가 함께한다. 다양한 디자인의 입체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은 작품의 이해를 도왔고, ‘창사’는 재해석되어 무대에서 라이브 목소리로 연출되었다. ‘박접무’ 본래의 가사와 「숨, 짓」의 메시지가 강조되어 전달력을 높였다. 자유로운 구성으로 변화무쌍한 춤이 연희되었다. 서로 등을 맞대거나 좌우대칭을 이루는 등 나비의 특징이 구현되었다. 한 무대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 미디어아트, 창사가 합쳐져 종합예술로서의 다채로운 성격이 노출되면서 「숨, 짓」은 대작의 시편(詩篇)이 되었다.
「숨, 짓」에서의 두 가지 오브제는 누에고치와 부채이다. 하얗고 주름진 누에고치, 크기가 커서 바닥에 놓기도 하고 무용수들이 들고 ‘접었다 폈다’ 하며 다양한 표현을 한다. 나비의 일생을 재미있게 표현된다. 부채살을 극대화한 부채는 부채를 감싸고 있는 천을 생략한 부채살로서 인고의 시간을 겪은 나비의 날개 모습을 희망적으로 표현한다. 궁중무용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박’의 모습이다. ‘박접무’와의 연관성은 부채살을 거꾸로 들고 ‘접었다 폈다’ 하면서 박을 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채는 작품의 시종에 ‘박’을 암시한다.
의상은 현대적 감각으로 원단이 주는 한국적 느낌을 살린다. 하의 바지의 모양은 밑단을 접어 올려 나비의 날개를 닮았고, 상의 볼레로는 ‘박접무’ 의상에서 따온 초록색 색감을 바탕으로 가벼운 노방 원단을 활용하여 펄럭이는 나비 날개의 느낌을 살렸다. 궁중무용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의상이다. 알에서 애벌레가 되는 인고의 성장을 겪는 장면까지는 자연스러운 노출이었고,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장면부터는 볼레로를 입고 등장하여 장면별 의상 연출이 조금씩 다르다.
서무의 음악은 태초의 자연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느낌이 강조된다. 편종과 편경 소리가 가미되어 전통의 맛을 실린다. 1장은 대지에서 깊숙이 생명의 존재가 숨을 틔우며 어렵게 올라온다. 2장은 인고와 성장의 도약을 강하게 보여주기 위해 전통악기보다는 현대감을 살려 리듬감에 집중한다. 3장은 비상을 꿈꾸는 나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애잔한 슬픔과 찬란함을 맞이하는 환희의 모습이 공존한다. 조금 다른 양상의 후무도 다채로운 안무가 연출되도록 서무의 분위기가 비슷하다.
미디어아트는 작품 전체의 흐름과 관객의 이해를 도우며 적절한 효과로 무용수들의 움직임이나 숨소리에 협업하여 장면을 극대화한다. 서무에서 누에고치 주변으로 먹이 퍼지는 디자인과 연결된 터널을 보여주며, 전통 질감을 토대로 전개될 작품을 암시한다. 1장에서 퍼지는 먹의 각도를 좁혀 무용수들이 만든 커다란 알 위에서 날카롭게 파고들며, 애벌레의 탄생 모습을 실감 나게 한다. 누에고치에 숨을 내쉬는 장면에서는 숨을 극대화하기 위해 누에고치 오브제에 대응하여 실제 숨 쉬는 듯한 모습을 구현한다.
2장에서 글씨를 삽입, 작품의 메시지를 재강조하면서 간결하지만, 핵심 내용을 드러내었고 주제 밀착의 연출적 고민을 해소했다. 후무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디어아트가 다시 삽입되는데, 서무에서 보였던 '먹'과 다르게 이듬해 봄을 다시 만난 듯한 희망의 색채인 노란색 '먹'을 통해 환희의 느낌을 표현한다. 흑색의 공간에서 탄생하고 숨을 내쉬었던 나비들이 인고를 딛고 성장하여 노란색 공간에서 비로소 날개를 달고 다시 도약한다. 동일한 질감의 색감 분위기로 작품의 도입과 종결을 마무리한다.
프롤로그_‘찰나의 존재’ : 인간은 찰나의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찰나의 숨·기억·짓, 희미하게 빛나기도 하는 이 순간의 찰나는 무척 소중하다. 찰나의 존재들이 모여 찬란함을 이루고, 비상의 내일을 희망하며 미래를 꿈꾼다.[거꾸로 접어 ‘박’처럼 세운 부채 앞에 무용수가 꿈틀대며 태초의 자연을 연상시킨다. 무용수는 다른 공간에 들어와 누에고치들 앞에 서서 박을 치며 작품의 시작을 알린다. 보컬리스트 김보라가 찰나의 봄날·시간·빛·순간·추억·숨을 읊는다. 누에고치 주변으로 먹이 퍼지듯 흑색의 미디어 디자인이 재생되고 무용수가 나아가는 길에는 점차 터널이 그려져 그곳을 파헤치며 들어간다. 몽환적인 음악 속에 찰나의 순간들이 집중된다.]
1장_‘탄생과 숨’ : 생명의 탄생. 부화한 애벌레들이 생의 시작을 알린다. 세상의 ‘첫 숨’을 내쉬며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따뜻함을 느낀다. 세상과 처음 마주한 ‘숨’은 영혼과 함께 하늘에 올라 찬란한 생명력을 짓는다. [무용수들이 알을 상징하는 덩어리를 이룬다. 덩어리 위는 미디어아트의 효과로 먹을 통해 좁고 강하게 떨어지는 덩어리들이 반응한다. 알이 깨어지며 무용수들이 떨어져 나간다. 무용수들은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기어다니며 ‘박접무’의 대표적 대형인 십자 형태가 된다. 고갯짓, 팔짓, 손짓, 발짓 등 다양한 ‘짓’에 중점을 두고 나비의 모습을 표현한다. ‘숨’은 무용수들과 미디어아트를 누에고치에 삽입하여 연기 효과로 표현이 극대화된다. 무용수들이 업은 누에고치는 삶의 짐을 상징한다. 누에고치의 뚫린 틈은 또 다른 세상을 내다보고 싶은 마음이며, 모자로 활용된 후, ‘박접무’에서 뒷짐을 지고 돌아가는 나비의 모습이 된다. 누에고치 더미 앞에 모여 다 같이 큰 숨을 몰아쉰다. 삶의 무게를 함께 내뱉는다.]
2장_‘인고와 성장’ : 비상을 꿈꾸는 나비의 마음이 다양한 ‘짓’으로 나타난다. 나비는 긴 세월을 거쳐 성장한다. 찬연한 짓들의 비상의 시간은 자유를 향해 도약하고, 삶을 향한 질주는 우리의 모습을 닮았다. 성장 속에서 인내하고 의지하며 내일을 위해 살아간다. [무대의 경계선 벽에 미디어아트로 “탄생 숨, 인고 성장, 꿈 비상, 순환 희망, 찰나의 순간이 모여 찬란한 시간을 만든다.”라는 글씨가 메시지를 강조한다. 두 무용수가 흑색 공간에 들어가 서로 닿지 않을 먼 거리에서 춤을 춘다. 움직임을 서로 호흡하며 양쪽 경계선에 의미를 부여한다. 또 다른 무용수 두 명, ‘후’하는 숨이 주는 바람에 굴러가며 호흡을 주고받는다. 본격적인 성장을 도모하기 전에 나비의 형상과 현재가 인고의 시간을 겪는 과정임을 표현한다. 둘의 본격적인 듀엣은 생(生)의 나아감이며 경계선을 달려와 그곳을 넘어 성장하려는 한 명의 징검다리가 된다. 무용수들은 협력하여 위로 올라가거나 매달리거나 점프로 도약하면서 서로의 성장을 돕는다. 네 번째 무용수를 위해 다시 한번 징검다리를 만들어주고 이들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성장을 위한 인고의 시간을 버틴다. 경계선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한번 숨을 내쉬며 위태롭게 경계선을 밟아 나간다. 나비가 날개를 달기까지의 과정과 우리의 모습이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도 서로 의지하고 인내하며 성장하고자 하지만 어려움에 부딪히면 마음의 경계선을 내재한 채 성장을 위해 인고의 시간을 버텨야 한다. 어려움에 직면한 나비도 인간 심리에 협력하면서 움직임을 통해 여정이 험난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3장_‘꿈을 위한 비상’ : 고단했던 찰나의 흔적에서 벗어나 하늘을 품으리라. 날개를 펼친다.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날갯짓한다. 희망이라는 무한 가능성과 경이로움의 순간들이 영원하길 고대하며 찬란한 시간을 맞이한다. 찰나의 ‘짓’이 모여 만들어진 생(生)은 덧없이 흘러간다. 삶을 반추하며 시간을 되돌아본다. 봄을 바라보는 삶의 언덕길에서 바라보니 어느새 저 산 위에선 작은 봄이 다시 피어난다. [한 무용수가 흑색 공간에 등장, 경계선에 다가간다. 그 경계선을 넘고 나니 나비가 훨훨 날 수 있는 세계가 펼쳐진다. 고대하던 찬란한 시간과 마주한다. 순간이 짧을 것이라 예감한 나비는 과거를 회상하며 슬픔에 젖는다. ‘박접무’의 창사를 김보라가 부르자 감정은 고조된다. 무용수가 부채를 들고 경계선을 밟고 등장한다. 긴 시간을 지나 날개를 펼 시간이다. 다양한 짓이 부채로 구현된다. 반대쪽 경계선에서 홀로 춤추던 무용수가 경계선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가듯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경계선은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네 명의 무용수들은 앞서 퇴장한 무용수의 경계선에 다가와 움직임을 멈춘다. 퇴장했던 무용수가 재등장하며 이들은 완전체가 된다. 바닥 경계도 허물어져 흑과 백의 공간을 동시에 사용하며 물리적 공간 이상의 느낌을 초월한다. 좁았던 화이트 호리존이 확장되면서 장면의 전환과 분위기가 이해된다. 나비들은 날개를 달고 비상하며 경계를 자유롭게 움직이고 환희의 세계로 날아간다.]
에필로그_‘순환 그리고 희망’ : 다시 봄,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 계절의 순환은 삶의 모습과 닮았다. 우리는 희망을 노래한다. [김보라가 찰나의 순간들을 읊으며 무대를 크게 한 바퀴 돌아 윤회를 상징한다. 무용수들은 서로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듯 김보라를 돌아 하수의 경계선, 상수의 경계선에 각각 다가가 머무르고 김보라를 감싸 원을 만든다. 인간 저마다의 경계선, 그것이 돌고 돌아 윤회에 이른다는 환생의 측면이 강조된다. 미디어아트는 노란색 먹이 퍼져 따스한 희망을 안겨준다. 무용수들은 몽환적 분위기 속에 ‘박접무’의 대표 대형인 열십자를 만들고 김보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던진 후, 부채를 거꾸로 눕혀 ‘박’을 세 번 치고 작품은 종료된다.]
찰나의 날갯짓이 희망을 뿌린다. 나비는 윤회한 영혼일지도 모르고, 장자(莊子) 숲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햇볕 따스한 봄날, 나비와 꽃이 어우러져 화사한 꽃을 마주하며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는 생동하는 기운을 사방에 뿌린다. 박접무의 창사(唱詞)는 고운 나비가 봄빛을 탐하고, 꽃은 금시조의 날개처럼 떨리도록 만든다. 나라의 평안과 행운, 개인의 건강과 행복을 염원하는 강력한 길상이 담긴 춤이다. 하나경 연출·안무의 「숨, 짓」은 고운 심성이 잉태한 이 시대의 옹골진 창작무용으로 한국무용사에 등재되었다. (출연 이도경 최혜은 유정안 신해원 하나경)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사진 옥상훈·사진제공 하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