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심각한 전력난 해소를 위해 핵융합 발전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
최근 오픈 AI, 구글 등 AI 기업들의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친환경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된 가운데, 핵융합 스타트업 '퍼시픽 퓨전'이 제너럴 카탈리스트를 비롯한 유수 투자사들로부터 9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유치했다.
특히 이번 투자는 기존 원자력 발전의 핵분열 방식이 아닌 태양을 모방한 핵융합 방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핵융합은 수소 원자핵들을 고온·고압 상태에서 융합시켜 막대한 에너지를 얻는 기술이다. 이는 기존 핵분열 방식보다 안전하고 방사성 폐기물도 거의 발생하지 않아 '꿈의 에너지원'으로 불려왔다.
퍼시픽 퓨전의 에릭 랜더 CEO는 설립자 편지를 통해 "핵융합은 CO2를 전혀 배출하지 않고, 다른 전력원보다 훨씬 적은 재료와 토지만으로도 수십억 년간 거의 무료로 전 세계에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이상적인 전력원"이라고 강조했다.
투자자 명단도 화려하다. 제너럴 카탈리스트를 필두로 구글 전 CEO 에릭 슈미트, 스트라이프 창업자 패트릭 콜리슨, 링크드인 창업자 레이드 호프만 등 실리콘밸리의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는 AI 시대 전력난 해소를 위한 핵융합 기술의 상용화 가능성에 대한 기술 업계의 높은 기대를 반영한다.
다만 전문가들은 핵융합 발전의 상용화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한다. 핵융합 플라즈마를 안정적으로 제어하고 실제 발전소 규모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기술적 난관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실험실 수준에서 성공한 핵융합 반응을 실제 발전소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1억도가 넘는 초고온 플라즈마를 장시간 안정적으로 가두어두는 기술이 필수적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열과 방사선을 견딜 수 있는 소재 개발, 효율적인 열교환 시스템 구축 등 해결해야 할 공학적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특히, 핵융합 발전소의 상업적 운영을 위해서는 투입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는 '점화' 상태를 달성하고 유지해야 하는데, 이는 아직 전 세계 어느 연구팀도 완벽히 성공하지 못한 도전 과제다. 여기에 발전소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인허가 획득, 안전성 검증, 대중 수용성 확보 등 제도적·사회적 장벽도 넘어야 한다.
더욱이 기존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통상 10년 이상이 소요되는 점을 고려하면, 완전히 새로운 방식인 핵융합 발전소의 상용화는 이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초기 설비 투자 비용이 기존 발전소보다 크게 높을 것으로 전망되어, 경제성 확보도 중요한 과제로 지적된다.
그럼에도 이번 대규모 투자는 AI 시대 전력 공급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퍼시픽 퓨전이 제시한 모듈식 접근방식은 기존 대형 핵융합 시설과 달리 확장성과 경제성을 갖춰 주목받고 있다. 퍼시픽 퓨전의 모듈식 설계는 표준화된 소형 부품들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기존 대형 핵융합 시설 건설 대비 공사 기간을 약 50% 단축하고 초기 투자 비용을 30% 이상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필요에 따라 모듈을 추가하거나 교체할 수 있어 유지 보수가 쉽고, 수요 변화에 따른 용량 조절도 탄력적으로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혁신적 접근은 핵융합 발전의 상용화 시기를 앞당기는 동시에 경제성 확보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투자를 계기로 핵융합 발전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블룸버그는 2050년까지 글로벌 핵융합 발전 시장이 약 40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더불어 관련 소재, 부품, 장비 산업의 동반 성장도 기대된다.
최근 악시오스 보도에 따르면, AI 시대 전력난 해소라는 시급한 과제가 핵융합이라는 새로운 에너지원 개발을 가속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다만 상용화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은 만큼, 단기적으로는 기존 신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의 조합이 현실적 대안이 될 전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