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도체 기업의 공격적인 가격 정책이 글로벌 D램 시장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중국 머니링크와 베트남 메콩아세안의 최신 보도에 따르면, CXMT와 JHICC 등 중국 업체들이 한국과 미국 제조사 대비 절반 가격으로 DDR4 제품을 공급하면서 시장 재편을 가속화하고 있다.
현재 D램 시장은 공급 과잉과 수요 부진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 디램익스체인지(DRAMeXchange) 자료에 따르면, 8Gb DDR4 표준 D램의 평균 가격은 7월에 비해 35.7% 급락했고, DDR5 시장도 16.1%의 가격 하락을 기록했다. 특히 중국의 CXMT가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며, 노무라증권은 연간 패널 20만 장 생산능력 확보로 글로벌 D램 시장의 15% 점유율을 달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시장 변화는 한국 기업들의 실적에 직접 타격을 주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D램 재고 수준이 각각 17주와 12주로 증가했으며, 애널리스트들은 다음 분기 삼성전자의 이익이 33%, SK하이닉스는 5%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중국으로의 반도체 수출 비중이 37.9%로 떨어져 12년 만에 처음으로 40% 선이 붕괴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대응해 한국 기업들은 전략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HBM3E와 같은 최신 세대 HBM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며, 서버용 DDR5 메모리 생산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내년 하반기 출시 예정인 6세대 HBM(HBM4)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TSMC와의 협력도 검토하는 등 고부가가치 제품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더욱 과감한 변화를 추진 중이다. HBM 매출 비중을 4분기에는 전체 매출의 40% 수준까지 확대할 계획이며, DDR4와 LPDDR4 등 레거시 제품 생산을 대폭 축소하는 대신 HBM, DDR5, LPDDR5 생산을 늘리고 있다. 또한 1b 나노미터 공정 전환을 앞당기고, PIM, CXL, AI SSD 등 다양한 인공지능(AI) 메모리 제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AI 메모리 시장 1위 수성을 위해 관련 핵심 조직을 5개로 확대하고 '원팀' 체계를 구축하는 등 조직 개편도 단행했다.
이러한 고성능 메모리 개발 전략은 AI와 데이터센터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HBM은 기존 메모리보다 훨씬 넓은 대역폭을 제공해 AI 모델의 학습과 추론 속도를 크게 향상시키고,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메모리 사이의 데이터 전송 병목현상을 해소하는 동시에 에너지 효율성도 높여준다. 특히 AI 메모리 시장의 급격한 성장이 예상되면서, 이는 한국 기업들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도전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중국은 2024년에만 18개의 신규 반도체 공장 가동을 예정하고 있으며, 총 28개의 공장을 추가 건설 중이다. 특히 SMIC는 75억 달러를 투자해 월 12인치 웨이퍼 10만 장 생산 규모의 톈진 공장을 신설하는 등 공격적인 확장을 진행 중이다. 비록 첨단 공정에서는 한국 기업들과 5년의 기술 격차가 있지만, 28나노 이상 레거시 반도체 생산에 주력해 2028년까지 글로벌 생산능력의 32%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더욱이 칩렛(작은 집적회로) 기술과 차세대 전력반도체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가운데 2025년 트럼프의 재집권은 이러한 시장 구도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트럼프는 모든 수입품에 10~20% 관세 부과를 예고했고, 반도체 과학법(CHIPS Act) 수정 가능성도 언급했다. 특히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강력한 제재가 예상되는 가운데, 이는 한국 기업들에게 양날의 검이 될 전망이다. 미국 시장의 부담이 커질 수 있으나, 중국 경쟁사에 대한 견제 강화에 따른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D램 시장 위기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2025년 D램 매출이 1365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특히 AI 관련 수요 증가로 HBM 등 고부가가치 제품 시장이 크게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기술 격차 유지와 생산능력 확보가 핵심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기업들이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이러한 변화에 성공적으로 대응한다면, 현재의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