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 은행·유령 법인·그림자 유조선 3중망 가동…미국 '최대 압박' 7년째 공전 이유
호르무즈 봉쇄로 '할인 원유 최대 수혜자'가 '에너지 위기 최대 피해자' 위기 직면
호르무즈 봉쇄로 '할인 원유 최대 수혜자'가 '에너지 위기 최대 피해자' 위기 직면
이미지 확대보기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6일(현지시각) 중국이 소형 독립 정유사, 제재 전력이 있는 소형 은행, 홍콩 유령 법인을 교묘하게 엮어 세계 최대 규모의 제재 우회 네트워크를 가동해왔다고 보도했다.
상품 분석 기관 클플러(Kpler) 집계를 보면 지난해 중국은 이란이 선적한 원유의 80% 이상, 하루 평균 약 140만 배럴을 빨아들였다. 워싱턴 소재 민주주의방위재단(FDD)의 맥스 메이즐리시 연구원은 WSJ에 "중국의 수년간 지원 없이는 이란이 이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거대한 석유 자금 흐름은 지금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새 변수와 맞부딪히며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번지고 있다.
'최대 압박'은 어떻게 무력화됐나
트럼프 1기 행정부는 2018년 이란산 원유를 사는 나라는 어디든 제재하겠다며 '최대 압박' 캠페인을 가동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클플러 자료에 따르면 이란의 일일 원유 수출량은 2018년 5월 약 280만 배럴에서 2019년 8월에는 20만 배럴 아래로 급전직하했다.
그러나 이란은 이 위기를 중국과 함께 돌파했다. '사하라 선더(Sahara Thunder)', '세페르 에너지(Sepehr Energy)' 같은 이름으로 위장한 원유 판매 유령 법인을 잇달아 세우고, 이란산 원유를 오만산·말레이시아산으로 둔갑시키는 허위 인보이스를 양산했다.
그 결과 2022년 말 이란의 수출량은 다시 하루 100만 배럴을 웃돌았고, 2025년에는 140만 배럴로 확대됐다. 10년 전 30% 수준이던 중국의 이란산 원유 흡수 비율은 이 기간 사실상 100%에 근접했다.
미국 연방 검찰이 2024년 공개한 기소장에는 이 구조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가 '차이나 오일 앤드 페트롤리엄(China Oil & Petroleum Co.)'이라는 위장 회사를 내세워 원유 거래를 직접 주도했으며, 유조선 한 척은 이란 시리 섬에서 원유를 선적한 뒤 다른 선박이 걸프만 밖에서 동명의 허위 위치 신호를 내보내는 방식으로 추적을 따돌렸다.
국가 안보 위협 전문 비영리 기관 C4ADS는 2019년 구성된 중국 기반 유조선단 하나가 현재 56척을 운용하며 제재 대상 원유 4억 배럴 이상을 수송했다고 분석했다.
소형 은행·티팟·홍콩 유령 법인…3중 우회 구조의 실체
중국과 이란이 구축한 제재 우회 체계는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고 WSJ는 전했다.
첫 번째는 산둥성에 밀집한 소형 독립 정유사, 이른바 '티팟(teapot)' 정유사들이다. 미국 금융시장 접근권을 지켜야 하는 시노펙, 중국석유천연가스(CNPC) 같은 국영 대기업들이 이란산 원유에서 발을 뺀 자리를 이들이 채웠다.
클플러 자료를 보면 이란산 원유는 중국 전체 해상 원유 수입(하루 약 1027만 배럴)의 약 13.4%를 차지한다. 중국 정부는 이들 소형 정유사의 민간 원유 수입 쿼터를 2018년 1억4000만t에서 올해 2억5700만t으로 두 배 가까이 늘렸다.
두 번째 기둥은 대금 결제를 소화하는 소형 은행이다. 미국 재무부에 따르면 쿤룬은행(Bank of Kunlun)은 2022년 기준 이란 석유 수입의 '상당 부분'을 예치하고 있다.
CNPC가 2009년 인수한 이 은행은 2012년 이란 은행들에 수억 달러 규모의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 혐의로 이미 미국 제재를 받아 달러 결제망에서 끊겨 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이란과의 위안화 결제 창구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세 번째 기둥은 홍콩과 중국 내 유령 법인을 활용한 통화 세탁이다. 이스라엘 모사드(Mossad) 경제전 부서 전 수장 우디 레비(Udi Levy)의 조사에 따르면, 이란 대형 금융기관 테자라트은행(Bank Tejarat) 산하 환전소 하나가 홍콩과 중국 내 66개 유령 법인을 통해 위안화를 달러나 유로로 바꿔왔다.
현금 이동 없이 중국 국영 기업들이 이란 내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고 그 대가로 원유를 받는 바터(물물교환) 방식도 동원됐다. WSJ에 따르면 이 경로를 통한 원유 대금 규모가 2024년 한 해에만 최대 84억 달러(약 12조 원)에 달했다.
역설—이란이 키운 불씨가 중국을 뒤흔들다
이 구조는 지금 심상치 않은 역설에 부딪혀 있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서 정작 이란산 원유를 가장 많이 사왔던 중국이 직격탄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유의 80%는 중국, 일본 등 아시아로 향한다. 중국의 중동 원유 의존도는 약 44%에 이른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약점을 정조준했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달 22일(현지시각) NBC방송에 출연해 "이란 원유는 늘 중국에 할인된 가격으로 팔려왔다"면서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으로 간다면 우리의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산 라이트 원유는 최근 중국 도착 기준으로 브렌트유 대비 배럴당 8~10달러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고 있으며, 이는 지난해 9월의 약 6달러 할인 수준보다 격차가 더 벌어진 것이다.
이란이 원유를 선뜻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 됐는데도 할인폭이 오히려 커졌다는 것은 구매자인 중국 소형 정유사들의 협상력이 그만큼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중국 중앙정부 입장도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다. 중국 세관 당국은 2023년 이후 이란산 원유 수입 통계를 공식 집계에서 아예 빼버렸다. 연구자들은 이를 워싱턴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려는 신호로 읽는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미 중국 티팟 정유사 3곳을 제재 명단에 추가한 상황에서 추가 지정을 우려한 일부 소형 정유사들 사이에서 이란산 원유 구매를 줄이는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한국에는 이 상황이 이중 충격으로 다가온다. 2024년 한국의 경제 원유의존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가운데 1위로, 국내총생산(GDP) 1만 달러당 5.63배럴을 소비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전 세계 해상 원유 교역의 20~25%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은 한국 수입 원유의 약 70%가 경유하는 핵심 병목 구간이다. 이란이 중국과 쌓아 올린 제재 우회 수입이 이란의 전쟁 수행 능력을 뒷받침했고, 그 전쟁이 한국의 에너지 공급망 심장부를 겨누는 구조가 된 셈이다.
중국 외교부는 WSJ의 관련 질의에 "불법적이고 부당한 일방적 제재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호르무즈 봉쇄가 이어지는 한 할인 원유의 최대 수혜자와 에너지 공급망의 최대 피해자라는 두 지위가 동시에 중국을 짓누르는 상황은 당분간 풀리기 어렵다는 시각이 시장 안팎에서 우세하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