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력망 배터리 65%·핵심소재 96% 중국에 의존…공급망 직격탄
트럼프 "100% 추가 관세" 위협…반도체 이어 에너지 신냉전 우려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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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전선(戰線)이 반도체에서 '에너지 심장'인 배터리로 급격히 옮겨붙고 있다. 중국 정부가 오는 11월 8일부터 대규모 배터리와 핵심 소재의 수출을 통제하는 고강도 조치를 단행하기로 하면서다. 이번 결정은 인공지능(AI) 혁명으로 폭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자국산 배터리에 기댈 수밖에 없는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12일(현지시각) 이 조치가 무역 협상을 앞두고 중국이 꺼내든, 과거 희토류를 능가하는 가장 강력한 경제적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이번 수출 제한 조치는 배터리 공급망의 거의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에 쓰는 대규모 리튬이온 배터리는 물론, 핵심 소재인 양극재와 음극재, 배터리 제조 장비까지 통제 대상에 올랐다. 해당 품목을 수출하려는 기업은 앞으로 중국 상무부로부터 별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제도는 사실상 중국 정부가 특정 국가나 기업을 상대로 수출을 통제하는 '선택적 무기화'가 가능한 강력한 수단을 쥐게 되는 셈이다.
AI가 부른 전력대란…美, 中 배터리 없인 '속수무책'
미국의 심각한 대중국 의존도는 문제의 핵심으로 꼽힌다. 블룸버그NEF(BNEF) 자료를 보면, 2025년 들어 7개월 동안 미국이 수입한 전력망 규모 리튬이온 배터리의 약 65%가 중국산이었다. 미국 내 배터리 생산 역량이 최근 크게 늘었지만, 핵심 소재와 부품 공급망까지 완전히 자립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번 조치의 충격은 더 크다. 매튜 헤일스 블룸버그NEF(BNEF) 분석가는 "이번 조치가 다른 중국의 수출 통제만큼 광범위한 산업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배터리 공급망에서 중국의 지배력을 생각하면 미국 기업들은 매우 신속하게 타격을 체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이번 조치는 AI 혁명이 부른 미국의 에너지 위기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는 보고서에서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이 2017년에서 2023년 사이 두 배 이상 늘었으며, 2028년까지는 최대 세 배까지 폭증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처럼 폭증하는 전력을 감당하고 정전을 막으며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한 대규모 배터리 저장장치는 미국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에밀리 킬크리즈 미국 신안보센터(CNAS) 국장은 "중국의 AI 붐은 미국산 첨단 칩 접근에 제약을 받지만, 미국의 AI 데이터센터 기반 시설의 제약은 에너지 수요"라며 미국의 약점을 정확히 짚었다.
'공급망 쇼크' 현실로…美 산업계·시장 충격파
중국의 통제는 완제품 배터리를 넘어 미국 내 생산 기반까지 위협한다. BNEF에 따르면 중국은 전 세계 음극재 생산의 96%, 양극재 생산의 85%를 차지하고 있다. 코리 콤스 트리비움 차이나 책임자는 핵심 부품이 통제 목록에 포함된 것을 "엄청난 수위 격상"이라 평하며, 중국 외 기업들의 절대적인 의존도를 지적했다. 셀리나 미콜라이차크 전 테슬라·파나소닉 임원은 "최근 투자가 집중되는 미국 남동부 지역의 신규 배터리 공장들이 원자재 공급망에 직접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조치 발표 뒤 배터리 기업 플루언스 에너지의 주가는 12% 넘게, 테슬라 주가는 5% 급락하며 충격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이번 조치가 단순한 무역 협상용 압박 카드를 넘어, 미래 산업의 패권을 쥐고 핵심 기술의 이전을 원천 차단하려는 장기 포석이라고 분석한다. 일라리아 마조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 연구원은 "중국은 핵심 기술을 내주지 않겠다는 뜻을 매우 명확히 해왔다"며 "앞으로 수십 년간 이 산업에서 선도적인 강대국이 되기를 진정으로 목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자국 내 생산 과잉 문제로 해외 시장 의존도가 높은 중국 배터리 업계에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배터리 통제라는 칼을 빼 든 중국의 다음 행보는 미국과의 무역 협상 결과에 달려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배터리 규제가 과거 희토류 카드보다 미국의 AI 기반 시설과 에너지 안보에 직접 타격을 줄 수 있어 협상 압박 효과가 훨씬 클 것으로 본다. 이달 말로 예정됐던 양국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에 참석할 이유가 없다"며 100% 추가 관세 부과를 위협하고 나서, 배터리가 부른 신냉전의 그림자는 한층 더 짙어지고 있다. 이번 조치는 단기적으로 미국의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확충 계획에 차질을 빚게 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세계 배터리 공급망의 재편과 미국의 기술 자립 전략을 더욱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