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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AI 거품 붕괴와 엔비디아 실적발표.. 뉴욕증시 닷컴 버블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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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거품 붕괴와 엔비디아 실적발표.. 뉴욕증시 닷컴 버블의 교훈
미국 워싱턴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일이다. 대표적인 싱크탱크이자 영향력이 센 경제단체 미국 기업연구소(AEI)가 연례 만찬 모임을 하면서 초대장을 보내왔다. 평소 취재차 자주 들르던 곳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다. 1996년 한 해가 저물어가던 12월 5일 목요일 밤으로 기억한다.
그날 AEI 연례 만찬의 초청 연사는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이었다. 연설의 주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앙은행이 직면한 어려움(The Challenge of Central Banking in a Democratic Society)'이다. 그린스펀은 이 만찬 연설에서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비이성적 과열이 자산 가치를 부적절하게 부풀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던 뉴욕증시 과열에 대한 일종의 공개 경고였다.
연준 의장은 흔히 금융 대통령으로 불린다. 통화량을 조절하고 금리 수준을 결정하는 통화정책의 최고 결정권자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연준 의장의 말 한마디는 영향력이 엄청났다. 그린스펀의 '비합리적 과열'이라는 발언이 나오자 전화통에 불이 났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송고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너도나도 먼저 속보를 보내려고 한꺼번에 전화통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AEI 만찬장은 한동안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기자들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잘 차려진 성찬을 눈앞에 두고도 굶어야 했다. 그래도 기자로서 역사적 현장을 생생히 지켜보면서 바로 급보를 보냈던 것은 지금도 평생의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당시 금융시장은 정말 뜨거웠다. 주식과 채권은 물론이고 금·은·구리 등 원자재, 원유·커피·설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오르고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것이 치솟는 이른바 ‘에브리싱 랠리’였다. 그때 에브리싱 랠리를 몰고 온 주역은 다름 아닌 인터넷이었다.

1989년 팀 버너스 리가 CERN에서 하이퍼텍스트 기반 정보 공유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를 기반으로 1990년 최초의 웹 브라우저와 웹 서버가 개발됐다. 1991년 8월 월드와이드웹(WWW)이 일반에 공개됐다. 1993년 미국 NCSA에서 개발한 모자이크(Mosaic) 브라우저가 등장하면서 일반 대중의 그래픽 기반 웹 탐색이 가능해졌다. 1994년 넷스케이프(Netscape) 브라우저와 상업적 인터넷 서비스가 확산되며 WWW가 폭발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웹 브라우저 출시로 컴퓨터 사용자들은 누구나 월드와이드웹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 혁명으로 컴퓨터 소유는 사치품에서 필수품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회사들이 설립됐다. 닷컴이라는 WWW의 확장자만 붙이면 돈이 몰려들었다. 닷컴 기업의 주가는 그야말로 폭발했다. 1994년 500선을 오르내리던 뉴욕증시 나스닥지수가 2000년 3월 5048까지 뛰었다. 5~6년 사이 무려 10배가량 오른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닷컴버블 시대’라고 부른다. 연준의 금리 인하와 통화량 증발도 닷컴버블을 더 부풀리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러시아가 제때 채무를 못 갚겠다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자 그 불똥이 미국으로 튈 것을 우려했던 연준이 기준금리를 잇달아 내렸다. 여기에 클린턴 정부가 ‘납세자구제법’을 제정, 최고 자본이득세를 대폭 낮추면서 버블은 더 커져만 갔다. 뉴욕증시에서는 주식과 채권에 투자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이상한 실업자들 이야기가 이어졌다.
닷컴 기업들은 줄을 이어 기업공개(IPO) 대박을 터트렸다. 실리콘밸리 영웅들은 일약 세계 최고 부자의 반열에 올랐다. 스톡옵션을 받은 직원들은 백만장자가 되었다. 한 번도 수익을 낸 적이 없거나 완성된 제품을 한 번도 만들어보지 못했던 무명의 신생기업들도 닷컴 이름만 달면 돈벼락을 맞는 그런 시대였다. 인터넷 시대에 사업 성공을 좌우하는 최대 변수는 선점효과였다. 먼저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성공의 열쇠였다. 닷컴 기업들은 가능한 한 빨리 시장 점유율과 소비자 인지도를 구축하는 데 올인했다. 수익보다 우선 성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과잉 투자가 배태됐던 것이다.
그린스펀의 '비이성적 과열' 발언은 바로 이 같은 과잉 투자를 경고한 것이다. 그린스펀의 발언 다음 날 뉴욕증시는 크게 떨어졌다. 닷컴버블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걱정은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이미 비이성적 과열 상태에 빠져 있던 시장은 그린스펀의 경고도 “건전한 일시 조정”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그린스펀 발언도 미국 뉴욕증시의 닷컴버블 앞에서는 무력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상황에서 연준이 충격 차단을 위해 한동안 통화 완화적인 비둘기파 신호를 보내자 더 뜨거워졌다.
닷컴버블은 이후에도 상당 기간 더 부풀어 오르다가 연준이 통화정책을 대전환,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거품이 붕괴됐다. 2000년 4월 14일 금요일 블랙 프라이데이가 닷컴버블 붕괴의 시작이었다. 나스닥지수는 한 주 동안 25% 하락했다. 그해 11월 9일 아마존닷컴의 지원을 받았던 유명한 회사 Pets.com은 IPO를 마친 지 9개월 만에 폐업했다. 6개월 새 인터넷 관련주 주식은 최고가 대비 평균 75% 하락했다. 시가총액 1조7550억 달러가 날아가 버렸다. 이듬해인 2001년 1월에는 단 세 개의 닷컴 기업만이 슈퍼볼 XXXV 동안 광고 시간을 구매했다. 9월 11일 터진 9·11테러는 뉴욕증시 붕괴를 더 가속화했다. 여기에 2001년 엔론 사태, 2002년 월드컴 사고 그리고 아델피아 커뮤니케이션스 코퍼레이션 스캔들이 잇달아 터지면서 닷컴버블 붕괴 충격은 역사상 최대 금융 참사로 확대되었다. 2002년 말 시가총액은 정점 이후 5조 달러나 줄었다. 그해 10월 9일 나스닥100 지수는 최고점 대비 78% 하락한 1,114를 기록했다. 닷컴버블 때 그 잘나가던 시가총액 1위 기업 시스코 주가는 88% 하락했다. 야후·인텔·아마존 등도 최고치 대비 시가총액이 90%가량 날아갔다. 닷컴버블 붕괴 충격은 오래갔다. 2000년 3월의 나스닥지수 5000선이 회복된 것은 2017년이다. 무려 17년 동안 닷컴버블의 후유증이 이어졌던 것이다. 닷컴버블의 정점이나 그 언저리에서 투자한 개미들은 그야말로 패가망신을 했다.

최근 들어 닷컴버블 붕괴라는 말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인공지능(AI) 붐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뉴욕증시에는 AI 버블을 경계하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AI버블도 닷컴버블처럼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25년 전 세계 금융을 뒤흔들었던 그린스펀의 '비이성적 과열' 발언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요즘 잘나가는 AI 관련 기업들의 밸류에이션 지표는 버블 붕괴 직전 닷컴 기업들과 유사하다. 투자 과열도 빼닮았다. 다만 AI는 인터넷보다 활용 범위가 넓고 수익모델이 단단해 닷컴버블처럼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린스펀의 비이성적 과열 그 임계점은 과연 얼마일까.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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