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선 '원스톱' 통과인데 미국선 4중 규제 첩첩산중…웨이저자 회장의 탄식
숙련공 부족에 문화 충돌·소송전까지…반도체 패권 노리는 칩스법의 그늘
숙련공 부족에 문화 충돌·소송전까지…반도체 패권 노리는 칩스법의 그늘
이미지 확대보기7일(현지 시각)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웨이저자(魏哲家) TSMC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은 최근 미국 진출 과정에서 겪은 고충을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하며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우리는 결국 1만8000개의 규정을 새로 만들어야 했고, 이 과정에서만 3500만 달러(약 514억 원)의 비용이 발생했다."
이는 반도체 제국을 이끄는 수장이 털어놓은, 미국이라는 시스템이 가진 고비용·저효율 구조에 대한 직설적인 토로다.
美 관료주의에 막힌 '속도전'
대만과 미국의 근본적인 환경 차이는 규제 시스템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만에서 TSMC와 그 협력사들은 정부가 지정한 산업 단지에 시설을 짓는다. 이곳에서는 중앙 당국으로부터 단 한 번의 허가(Permit)만 받으면 모든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원스톱 시스템'이 작동한다.
반면 미국 애리조나의 상황은 판이하다. 시(市), 카운티(County), 주(州), 연방 정부 등 4중으로 겹쳐진 규제 당국과 각각 협상을 벌여야 한다. 공장 하나를 짓기 위해 수천 건의 개별 승인이 필요하다.
이러한 규제의 장벽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역사적 성공이 낳은 산물이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대기 및 수질 오염을 줄이고 작업장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환경·안전 규제를 도입해 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비대해진 관료주의는 종종 일관성 없는 방식으로 규칙을 집행하며, 초격차 기술 경쟁을 벌여야 하는 첨단 산업의 발목을 잡는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
고객사 압박에 떠밀린 '도미(渡美)'
TSMC는 칩을 설계하지 않고 만들어주기만 하는 회사다. 최근 몇 년간 TSMC의 주요 고객사들은 중국이 대만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할 경우 발생할 칩 공급 중단 사태를 심각하게 우려해 왔다. 인공지능(AI) 산업의 폭발적 성장을 주도하는 엔비디아와 같은 기업들에게 대만 의존도는 곧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리스크다.
TSMC의 한 대형 고객사는 미국 내에 첨단 제조 공장을 설립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고, TSMC는 독일과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로 생산 거점을 다변화하는 것으로 이에 응답했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칩스법(CHIPS and Science Act)'을 통해 보조금을 책정하며 이러한 움직임을 부추겼다. TSMC에는 66억 달러(약 9조7000억 원)가 배정됐다.
애리조나 상무국과 애리조나 주립대(ASU) 등 지역 기관들도 1950년대 중반 모토로라의 진출, 1980년 인텔 챈들러 공장 개소로 이어진 지역의 반도체 유산을 강조하며 적극적인 구애를 펼쳤다. ASU는 지난 15년간 공대 학생 수를 6000명에서 3만 3000명으로 늘리며 인력 공급을 자신했다.
문화 충돌과 '숙련공 가뭄'
그러나 막대한 자본과 정책적 지원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난관이 바로 '사람' 문제다. 반도체 제조는 흔히 '산업적 마술(industrial magic trick)'이라 불린다. 인간 머리카락 두께의 5000분의 1 수준인 미세한 빛을 쏘아 실리콘 조각 위에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새겨 넣는 공정은 고도의 정밀함을 요구한다. 이 장비를 설치하고 정상적으로 가동하기 위해서는 특화된 훈련과 경험을 갖춘 숙련된 인력이 필수적이다.
2년 전, TSMC는 현지에서 장비를 다룰 줄 아는 숙련공을 구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음을 공식 인정하고 대만에서 500명 이상의 숙련 인력을 미국으로 데려왔다. 이는 즉각적인 반발을 샀다. 현지 노조는 TSMC가 연방 보조금의 취지를 위반했다며 이민 당국에 대만 근로자들의 비자 발급 차단을 요구했다. 회사가 미국 근로자 채용에 우선순위를 두겠다고 약속하며 급한 불은 껐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
최근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 시설의 전·현직 TSMC 직원 28명이 제기한 집단 소송은 이러한 문화적 충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원고 측은 대만 출신 고위 관리자들이 업무 소통에 중국어를 사용하며 미국인 근로자를 배제하고, 현지 채용 인력을 비하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회사가 현지 인력 교육에 투자하기보다 대만 인력을 수혈하는 관행을 고수하고 있으며, 공장 내부 환경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TSMC 측은 소송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피하며 "안전하고 포용적인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내놓았다.
"대만 방식 그대로" vs "여긴 미국"
현장 안전 기준을 둘러싼 시각차도 뚜렷하다. 피닉스 소방서 검사관 출신으로 2022년 6월 TSMC에 방재 엔지니어로 입사했던 데이비드 아미리(34)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입사 후 스프링클러 시스템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상부에 보고했다. 이는 안전과 직결된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그가 접촉한 대만 관리자는 "미국에서도 대만 방식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따르길 원한다(They wanted to copy in the U.S. exactly how they do it in Taiwan)"며 설계를 변경하지 않았다.
결국 TSMC 측 보험사 검사관이 뒤늦게 이 결함을 지적하며 수정을 요구했고, 이를 바로잡는 데만 수십만 달러(Six figures)가 소요됐다. 좌절감을 느낀 아미리는 지난 6월 회사를 떠났다. 이는 TSMC의 성공 방정식이 미국 현지의 안전 규정이나 문화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물 부족·주민 반발 '이중고'
물 부족 문제 또한 피닉스에서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다. 반도체 공장은 공정 특성상 막대한 양의 물을 소비한다. TSMC의 초기 3개 공장이 소비할 것으로 예상되는 물의 양은 하루 1640만 갤런에 달하며, 이는 20만 가구의 사용량과 맞먹는다. TSMC는 폐수 처리 시설을 건설해 물을 거의 전량 재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는 주 당국과 지역 사회의 우려는 여전하다.
여기에 후공정 생태계 조성 과정에서 발생한 주민 반발도 변수다. 칩 제조의 마지막 단계인 패키징을 담당하는 앰코테크놀로지(Amkor Technology)는 TSMC의 AI 칩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피닉스 서쪽 피오리아(Peoria)에 20억 달러(약 2조9000억 원) 규모의 공장 건설을 계획했다. 투자 규모는 이후 70억 달러(약 10조 2000억 원)로 불어났다.
문제는 입지였다. 공장 부지는 주택, 식당, 사무실이 들어설 예정이었던 320에이커 규모의 땅 한가운데였다. 주민들은 주거 지역 인근에 거대 공장이 들어서는 것에 강력히 반발했다. 시 당국이 건물 높이 제한(54피트) 등을 약속하며 달래기에 나섰지만, 계획된 공장 규모가 초기보다 4배 이상 커지고 건물 높이도 두 배로 높아지자 주민들은 시의회로 몰려가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결국 제이슨 벡 피오리아 시장은 물밑 협상을 통해 주 정부 토지 경매로 더 외진 곳에 더 넓은 부지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앰코는 최근 새로운 부지에서 착공식을 가졌다. 벡 시장은 이 과정을 회고하며 "때로는 상황이 험악해지기도 한다(Sometimes, things get ugly)"고 말했다. 이는 첨단 기술 패권을 위한 워싱턴의 청사진이 지역의 현실에 착륙할 때 발생하는 파열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난관 속에서도 확장은 계속되고 있다. 2024년 봄까지 3개의 공장 건설과 650억 달러(약 95조 원) 투자를 약속했던 TSMC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이후 계획을 두 배 이상 확대하기로 약속했다. 이는 복잡한 규제와 문화적 충돌, 비용 증가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미국 내 생산 기지 확보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시사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