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협상팀의 대실수, 유럽 동맹과 균열만 키워
국익 대신 사익 추구…푸틴에게만 막대한 선물 안겨
국익 대신 사익 추구…푸틴에게만 막대한 선물 안겨

이번 회담은 '트럼프 독트린'이라는 허상을 걷어내고, 사익이 국가 정책을 압도하는 '도둑 정치(kleptocracy)'의 민낯만 드러낸 채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안보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 '합의 없는 합의'…푸틴의 완승으로 끝난 부조리극
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은 한 편의 부조리극이었다. 의기양양한 푸틴 대통령과 달리 눈에 띄게 침울한 표정의 트럼프 대통령은 연단에 서서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합의가 없는 것"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2024년 대선 때 "취임 첫날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했던 그는 '합의 없음'이라는 결과를 내놓기까지 210일을 허비했다.
회견 내내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무절제한 칭찬 속에서 여유롭게 판을 주도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안보를 위협한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하며 "갈등의 모든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해,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부정하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이 당시 집권했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라며 트럼프의 공치사를 확인해주기도 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스캔들'에 대한 개인적 불만을 토로하고, 푸틴 대통령과의 "환상적인 관계"를 과시하는 데 시간을 썼다. 미군 기지에 제재 중인 '전범'을 초청해 레드카펫을 깔아주는 이례적인 환대를 베푼 끝에 나온 결과였다. 이 자리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옛 소련을 상징하는 'CCCP' 문구가 새겨진 옷을 입고 등장해 회담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질문도 답변도 없이 회담은 끝났고, 트럼프 대통령은 무대에서 도망치듯 퇴장했다.
◇ 무너진 협상팀…'폭발적 대실수'와 내부 분열
이번 외교 참사의 배경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무능과 내부 분열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외신은 전했다. 회담 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등 유럽 동맹국들은 '휴전이 모든 협상의 전제 조건'이라며 러시아 제재 압박을 주문했지만, 트럼프는 이를 무시했다. 독일 유력지 '빌트'는 지난 9일, 트럼프의 개인 협상가인 부동산 업자 스티브 윗코프가 "폭발적 대실수"를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윗코프 특사는 푸틴 대통령이 헤르손과 자포리자에서 '우크라이나군의 평화적 철수'를 요구한 것을, '러시아군의 평화적 철수' 제안으로 완전히 오해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5개 주(도네츠크,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 크름)에 대한 완전한 통제라는 기존 태도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는데도, 윗코프는 이를 푸틴의 양보로 오판한 것이다. 한 우크라이나 관리는 빌트에 "윗코프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고 혹평했다. 이로 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유럽 정상들과 함께 워싱턴을 긴급 방문해 '피해 복구 외교'에 나서야만 했다.
미국 협상팀 내부의 혼란상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J.D. 밴스 부통령이 마찰을 빚었고, 윗코프 특사가 부통령 편에 서서 유럽 동맹국들을 협상 과정에서 배제하려 한 사실도 알려졌다. 유럽 측은 미국 협상팀이 "혼란스럽고 분열됐으며", 윗코프 특사가 "벅차고 무능해 보였다"고 평가했다.
◇ 국익은 뒷전, 푸틴에게 쏟아진 경제적 선물
미국 언론이 간과한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약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트럼프는 알래스카의 천연자원과 베링 해협 유전·가스 채굴 접근권을 제공하고, 러시아 항공 산업 제재 해제를 약속했다. 러시아 공군이 미국산 부품을 다시 공급받을 길을 열어주는 조치다. 심지어 현재 러시아가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영토 안 희토류 채굴권까지 승인할 뜻을 내비쳤다.
더욱 충격적인 대목은 윗코프 특사가 러시아 측에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 점령을 전쟁 종식 모델로 삼을 수 있다"고 제안한 점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통제권을 영구히 갖는 방안을 미국이 먼저 제시한 것으로,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발언이다.
◇ '트럼프 독트린'의 실체는 도둑 정치
'트럼프 독트린'의 실체는 도둑 정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미국 잡지 뉴요커는 트럼프가 2기 임기 단 6개월 만에 약 35억 달러(약 4조8867억 원)에 이르는 개인적 이익을 챙겼다고 추산했다. 이번 정상회담 3일 전에는 트럼프 가문의 암호화폐 사업체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이 가족 토큰 매입을 위해 15억 달러(약 2조943억 원)를 모금하기도 했다. 이 회사의 이사회에는 윗코프 특사의 아들과 트럼프의 차남 에릭 트럼프가 합류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에어포스원 안에서 "푸틴은 똑똑한 친구다. 우편 투표로는 정직한 선거를 할 수 없다고 하더라"며 국내 정치에 대한 불안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알래스카에 남은 혼란스러운 장면은 한 국가의 외교가 리더의 사익과 무능 탓에 어떻게 처참하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잔해로 남았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