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생금융에 2조원 넘는 자금을 투입한 은행권이 내년에도 비슷한 규모의 청구서를 받을 전망이다. 서민 체감경기가 갈수록 어렵다지만 일회성일 줄 알았던 상생금융이 정례화되는 분위기에 은행권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매년 순이익의 2조원을 상생금융에 투입할 경우 정부 주문에 따라 사활을 걸고 있는 밸류업 프로그램(기업가치 제고)과 주주가치 증대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분석이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과 은행권은 이달 중 발표 예정인 상생금융 방안을 최종 협의하며 규모 등을 조율하고 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전날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국정 후반기 첫 민생토론회에서 "은행과 협의해서 장기로 분할 상환하는 방안, 이자 부담을 조금 더는 방안 등을 협의할 것"이라고 상생금융 방안을 제시했다. 금융당국은 이달 안에 협의해서 구체적인 방안을 내고, 내년에 집행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액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은행권은 올해와 비슷한 2조원대 상생금융안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권은 지난해 12월 코로나19 이후 고금리·고물가를 겪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이자캐시백 프로그램' 포함, 총 2조원 규모의 지원 방안을 발표하고 올해 집행한 바 있다.
상생금융은 지난해 고금리로 서민·소상공인들의 고통이 가중된 가운데 최대 실적을 올린 은행권이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일종의 사회공헌 활동이다. 다만 윤석열 대통령과 금융위원장·금융감독원장 등 금융당국 수장들까지 압박을 가하면서 자율의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반강제적이었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2월 '이자 장사'로 성과급 잔치를 벌인 은행권을 맹비난하자 은행권은 8월까지 상생금융으로 4700억원을 집행했다. 윤 대통령은 그해 10월 재차 '종노릇'이라는 격한 표현을 쓰며 비판 수위를 높였다. 금융당국도 1조원대 상생금융안에 대해 못마땅한 눈총을 주자 은행 출연금은 '2조원+α' 규모로 확대됐다. 이를 두고 금융권 안팎에선 '상생금융 시즌1'과 '시즌2'로 구별해 불렀다.
문제는 매년 '2조원+α' 규모의 상생금융이 정례화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초 2조원대 출혈이 일회성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은행권도 당혹해 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지난해는 어려운 경제 상황을 감안해 한 번으로 끝날 것이라는 기대가 지배적이었다"면서 "올해 하반기 금리 인하기에 접어들면서 소상공인들 고통은 경감되고 은행권 수익성은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매년 2조원대를 투입하는 것은 부담"이라고 고충을 드러냈다.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밸류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은행지주들은 정부의 밸류업 정책에 따라 주주환원 정책 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순이익을 상생금융에 쓰면 배당 여력이 감소할 수밖에 없어서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막대한 상생금융 부담은 배당 확대에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밸류업의 최대 걸림돌은 관치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