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 선단 공정 주문 포화로 팹리스 '공급망 다변화' 사활…18A 공정 갖춘 인텔 주목
미국 칩스법·소프트뱅크 등 200억 달러 자금 확보로 재무 리스크 해소…주가 재평가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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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인공지능(AI) 혁명이 촉발한 고성능 반도체 수요 폭증이 역설적으로 글로벌 제조 공급망의 심각한 병목 현상을 야기하고 있다. 이는 반도체 산업의 실패가 아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압도적인 성공이 빚어낸 구조적 문제다. 업계 1위인 대만 TSMC가 정점에 달한 제조 역량을 가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성장 속도가 개별 기업의 확장 속도를 추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텔(Intel)이 글로벌 기술 섹터가 직면한 '행복한 비명'이자 '고품질의 난제'를 해결할 유력한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20일(현지시각) 마켓비트 등 외신에 따르면, 인텔은 TSMC의 생산 능력 한계로 인한 낙수 효과를 가장 크게 누릴 잠재적 승자로 지목된다.
TSMC가 최근 발표한 실적 보고서는 현재 반도체 공급망이 받고 있는 압력을 수치로 증명한다. AI 구동의 핵심인 고성능 컴퓨팅(HPC) 부문은 이제 TSMC 전체 매출의 57%를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주력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7나노미터(nm) 이하의 최첨단 미세 공정 매출 비중이 전체의 74%에 달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 세계 주요 칩 설계 기업(팹리스)들의 수요가 TSMC의 선단 공정에 집중되면서, 이들은 '단일 공급망' 의존이라는 심각한 리스크에 직면하게 되었다. 수십억 달러가 투입된 신제품 출시가 특정 제조사의 생산 일정 지연이나 차질로 인해 무산될 경우, 그 피해는 파국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공급망 다변화가 팹리스들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으며, 이는 지난 10여 년간 경쟁자들에게 닫혀 있던 시장의 틈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틈을 파고들 준비를 마친 가장 유력한 후보가 바로 인텔이다.
200억 달러 '실탄' 확보…'IDM 2.0' 리스크 걷어내고 현실화
여기에는 미국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에 따른 자금 지원뿐만 아니라, 소프트뱅크의 20억 달러(약 2조9500억 원) 투자,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엔비디아(NVIDIA)의 50억 달러(약 7조3750억 원) 투자가 포함된다. 이러한 재무적 방어벽은 인텔 파운드리 사업부가 2025년 3분기에만 23억 달러(약 3조3925억 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제조 시설 확장을 흔들림 없이 추진할 수 있는 안정성을 제공한다. 인텔의 전략은 단순한 자금 확보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기술적 진보와 지정학적 이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애리조나주에 위치한 '팹 52(Fab 52)'는 인텔의 차세대 18A(1.8나노급) 공정에 특화된 시설로, 현재 완전히 가동되며 아시아 중심의 공급망을 대체할 미국 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인텔은 이미 이 공정 노드에서 생산된 자사의 주력 제품인 '팬서 레이크(Panther Lake)' CPU를 공개함으로써 기술의 양산 가능성을 입증했다.
또한 잠재 고객들에게 전체 웨이퍼 계약을 체결하기 전, EMIB나 포베로스(Foveros)와 같은 첨단 패키징 기술을 먼저 제공함으로써 인텔의 제조 생태계로 진입할 수 있는 관문을 열어두고 있다.
엔비디아와의 '기술 동맹', 단순 투자를 넘어선 생태계 편입 신호
최근 인텔의 행보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사건은 단연 AI 반도체 분야의 절대 강자인 엔비디아와의 협력이다. 이는 단순한 50억 달러(약 7조3750억 원) 규모의 자금 수혈을 넘어선, 강력한 기술적·전략적 승인으로 해석된다. 엔비디아의 투자는 인텔의 장기적인 기술 로드맵이 시장에서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신호탄이다. 양사의 협력은 인텔의 x86 CPU와 엔비디아의 가속 컴퓨팅 플랫폼을 엔비디아의 독자적인 인터커넥트 기술인 'NVLink'로 통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쉽게 말해, 두 회사의 핵심 기술 사이에 초고속 데이터 교량을 놓아 AI 데이터센터 내에서 양사 칩이 더욱 효율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인텔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다. AI 시대에 인텔 CPU의 효용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엔비디아가 장악하고 있는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생태계로 직접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투자자 관점에서도 이 파트너십은 인텔이 AI 경쟁에서 도태되고 있다는 기존의 비관적 서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업계 내 다른 팹리스 잠재 고객들에게 엔비디아라는 거물이 인텔을 장기적인 협력 파트너로 인정했다는 사실은 리스크를 상쇄하는 보증수표와 같다. 이는 다른 팹리스 기업들이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결정할 때, 이미 업계 표준 수준의 생태계 지원이 마련되어 있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진입 장벽을 낮추는 효과를 낸다.
투자자들에게 현재의 변화는 매력적인 기회로 다가온다. 시장의 관심이 인텔 내부의 경영 난제에 쏠려 있는 동안, 외부에서는 첨단 제조 역량의 구조적 부족이라는 강력한 촉매제가 경쟁 환경을 인텔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가치 평가의 격차는 극명하다. 인텔의 시가총액은 약 1680억 달러(약 247조 원) 수준으로, 1조4600억 달러(약 2152조 원)에 달하는 TSMC의 일부에 불과하다. 주가매출비율(P/S)을 비교해보면 인텔은 약 3배 수준에서 거래되는 반면, TSMC는 10배를 상회한다. 이는 인텔 파운드리 사업이 궤도에 오를 경우 주가 상승 여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인텔의 'IDM 2.0' 전략이 최종적으로 검증받고 파운드리 사업부가 수익성 있는 궤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18A 공정에서 대규모 물량을 소화할 고객사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인텔에게는 변곡점이 될 것이다. 현재 월가 애널리스트들의 컨센서스가 '비중 축소(Reduce)'에 머물러 있는 것은 과거의 실적 부진에 기반한 회의론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비관론은 현재 주가에 미래의 호재가 반영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선구안을 가진 투자자에게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반도체 업계가 전례 없는 수요의 파도를 넘고 있는 지금, 인텔의 전략 성공 여부를 가늠하기 위해 투자자들은 몇 가지 핵심 지표를 주시해야 한다. 첫째, 인텔 18A 공정을 이용할 대형 파운드리 고객사의 공식 발표 여부다. 둘째, 향후 실적 발표에서 공개될 18A 공정의 제조 수율 및 성능 지표의 개선 추이다. 셋째, 인텔이 확충하고 있는 미국 내 제조 기반을 활용한 추가적인 전략적 파트너십 체결 소식이다. TSMC의 독주 체제는 당장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의 지반은 분명히 흔들리고 있다. 업계는 더 많은 생산 능력을 갈망하고 있으며, 막대한 자본과 지정학적 위치를 무기로 한 인텔은 그 갈증을 해소할 준비된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