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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 다카이치 "여자 아베의 독설"

다카이치 일본 자민당 총재 당선 쓰케아가루(つけ上がる) 일본 새 총리 선출 관전 포인트
김대호 박사 인물연구  일본 새 총리 다카이치  이미지 확대보기
김대호 박사 인물연구 일본 새 총리 다카이치
일본 사람들은 싫은 소리를 잘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 말은 좀체 꺼내지 않는다. 이른바 다테마에(建前) 문화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바로 목을 베는 사무라이 시대를 살아오면서 생겨난 생존의 처세술이라고 볼 수 있다. 속마음은 물론 따로 있다. 일본에서는 그 속마음을 혼네(本音)라고 한다. 일본어에 욕에 대한 표현이 많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어도 겉으론 최대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이런 일본에서 대놓고 한국 사람을 욕하는 정치인이 있다. 일본의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선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다. 현역 국회의원(중의원)이다. 총무성 대신과 경제보안성 장관을 역임한 거물이다. 내각책임제를 택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시스템상 다수 집권당 총재가 총리에 오늘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 자민당은 10월 초 새 총재를 뽑는다. 다카이치가 일본의 최고권력자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다카이치가 새 총리 물망에 오르면서 그의 망언(妄言)이 다시 크게 조명받고 있다. 다카이치는 2022년 2월 도쿄도에서 열린 ‘야스쿠니 신사 숭경 봉찬회’에서 한국인을 언급하면서 '쓰케아가루(つけ上がる)'라는 표현을 썼다. 한국어-일본어 사전에 따르면 '쓰케아가루'는 우리말로 '버릇없이 굴다' 또는 '기어오르다'로 번역돼 있다. 적어도 겉으론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본의 오랜 다테마에 문화에 비춰볼 때 '쓰케아가루'는 상당히 무례한 표현이다. 외교적으로 선을 넘는 망언이다.

다카이치의 한국인 비하 발언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일본 고위층의 야스쿠니 참배가 한국인의 식민지 감정을 건드린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다카이치는 "途中で参拝をやめるなど中途半端なことをするから相手がつけ上がる"라고 답했다. 도중에 참배를 그만두는 등 어중간한 일을 하기 때문에 상대가 기어오른다는 말이다. "점잖게 대해 주니 버릇없이 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카이치는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그 같은 표현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면서 일본군 성노예 강제 동원을 한국 자작극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일본 언론들은 다카이치가 새 총리에 오르면 "기어오른다"는 발언이 두고두고 한·일 관계에 부담이 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다카이치는 1961년 일본 나라현에서 태어났다. 고베대를 졸업하고 마쓰시타 정경숙에 들어가 수학했다. 졸업 후 방송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시사 방송 캐스터를 잠시 하다가 1992년 자민당에서 참의원 선거 출마를 시도했으나 공천을 받지 못했다. 1993년 중의원 선거에 32세 나이로 무소속 출마해 당선된다. 이후 자민당에서 분파한 자유당을 거쳐 오자와 이치로가 이끈 신진당으로 갈아탔다. 소선거구제로 바뀐 1996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재선 시절 오자와와 정책 갈등 끝에 탈당해 자민당으로 당적을 바꾼다. 자민당에서의 파벌은 세이와카이였다. 자민당 오부치 내각 때 통상산업성 정무차관, 고이즈미 내각 때 경제산업부 대신을 지냈다. 2003년 중의원 선거 때 낙선했다. 이때 당시 자민당 의원이었던 야마모토 다쿠와 결혼했다. 2005년 중의원 선거 때는 고이즈미 총리로부터 이른바 ‘자객 공천’을 받았다. 고이즈미의 우정 민영화에 반대한 자민당 현역 의원 대항마로 출마해 당선된다.

2006년 아베 신가 총리에 오르면서 다카이치는 중앙 정계의 중심인물로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아베 1기 내각에서 저출산과 남녀평등 등을 담당하는 장관에 임명된다. 2012년 자민당 총재 선거 때에는 한동안 속해 왔던 세이와카이 파벌에서 탈퇴하면서까지 아베를 적극 지원했다. 이 선거에서 아베가 다시 집권하면서 다카이치는 아베의 핵심 세력으로 함께 승승장구한다. 일본 정계에서 여성으로는 처음 당의 정책을 총괄하는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에 올랐다. 그 뒤 3년간 미디어 정책과 지방자치 등을 관장하는 총무대신에 임명된다. 역대 가장 긴 임기였다. 아베 이후 기시다 정권에서도 아베파 몫으로 자민당 정조회장을 맡기도 했다.

2022년 7월 아베가 총격으로 돌연 사망했다. 아베 사망으로 다카이치는 한때 오리알이 됐다. 다카이치는 현재 파벌에 속해 있지 않다. 애초 세이와카이 소속이었으나 아베 지원을 위해 파벌을 탈퇴한 상태다. 그렇다고 아베 파벌도 아니다. 아베와는 가까웠으나 아베 사후 그의 세력으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아베 맹신자이면서도 아베파를 모두 흡수할 정도는 아니다. 업무 능력에는 의문부호가 따라다녔다. 일본 정치에서 특히 중시되는 당내 조정 능력도 그렇게 높이 평가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고이즈미와 함께 자민당 총재 선거 여론조사에서 공동 1위를 달라고 있다.

보수 색채가 짙은 일본에서 여성이 유력 총리 후보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카이치가 당선된다면 일본 민주주의 역사상 최초의 여성 최고권력자가 된다. 지금도 일본 사회에서는 여성 총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그럼에도 총리 선호도에서 최상위권에 올라있는 가장 큰 동력은 단연 아베다.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일본 보수 세력의 영원한 지도자 아베에 대한 연민과 향수가 다카이치에 대신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다카이치가 집권한다면 아베의 시즌2가 펼쳐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 헌법을 바꿔 자위대를 정식 일본의 국가 군대로 재편하려고 했던 아베의 구상들은 이미 다카이치의 공약에 들어와 있다. 전쟁할 수 있는 정상 국가, 즉 세계의 패권을 다시 주도하는 위대한 국가 일본의 건설이 바로 다카이치의 목표다.
다카이치는 또 '아베노믹스'의 부활을 내세우고 있다. 아베노믹스는 총리 아베가 2012년부터 시행한 경제정책이다. 금융완화와 재정지출 확대, 경제성장 전략이 아베노믹스의 3대 핵심이다. 대규모 국채 매입과 마이너스 금리 그리고 엄청난 양적완화 등이 아베노믹스의 이름으로 추진됐다. 일본 경제 재생을 위한 긴급 경제대책도 수시로 발동됐다. 아베노믹스는 잃어버린 30년을 초래한 그 지긋지긋했던 디플레이션을 퇴치하는 데 나름대로 일조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문제는 코로나19 이후 확 바뀐 오늘날의 경제 여건에서 과연 아베노믹스가 제대로 가동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에서도 이미 물가가 부담이 되고 있다.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해야 한다는 여론도 적지 않다. 이런 마당에 아베노믹스 시즌2가 수정 없이 그대로 부활하면 성장률은 더 올라가겠지만 안정기조가 무너질 수도 있다. 아베노믹스는 엔화 약세와 달러 강세를 유도할 수 있다. 우리나라 원화 환율과 수출 경쟁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다. 다카이치는 미국에 대한 5500억 달러 투자 협정도 다시 검토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3500억 달러를 두고 협상을 진행 중인 한국과 미국의 관세협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 사안이다. 한국이 기어오른다고 비난하면서 아베노믹스의 부활을 꿈꾸는 다카이치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야 할 이유는 참 많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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