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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TSMC, 美 본토서 엔비디아 '블랙웰' 첫 생산…美 반도체 부활의 신호탄인가

애리조나 4나노 공정 가동…젠슨 황 "美 역사상 가장 중요한 칩"
패키징 기술 없어 다시 대만行…여전한 '반쪽짜리 독립'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미국의 반도체 제조 부활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기업인 대만 TSMC가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위치한 '팹21(Fab 21)'에서 엔비디아(Nvidia)의 최신 인공지능(AI) 가속기인 '블랙웰(Blackwell)' 생산을 위한 첫 웨이퍼 제조에 성공했다.
19일(현지 시각) 유러피언 비즈니스 리뷰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TSMC와 엔비디아는 10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통해 이 같은 성과를 공유했으며, 이는 단순한 시제품 생산을 넘어 4나노미터(4N) 미세 공정이 미국 땅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중대한 분기점이다.

이번 생산 개시는 통상적인 반도체 양산 소식과는 궤를 달리한다. 현재 전 세계 AI 열풍을 주도하는 핵심 그래픽처리장치(GPU)급 칩이 미국 본토에서 생산된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는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부터 추진해온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이 정권교체 이후에도 실질적인 산업적 결과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자 엔비디아의 주가 흐름에도 긍정적인 모멘텀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이번 성과에 대해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단일 칩이, 미국 내 가장 진보된 팹인 TSMC에 의해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다"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의 발언은 블랙웰 생산이 단순한 기술적 성취를 넘어 미국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주도권을 되찾아오겠다는 지정학적 의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패키징 기술 없어 대만 U턴…'반쪽 성공'


그러나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이번 성과는 '완전한 미국산(Made in USA)'이라 부르기엔 한계가 명확하다. 엔비디아 측은 블랙웰이 '대량 생산(volume production)' 단계에 진입했다고 평가했지만, 애리조나 팹에서 갓 나온 웨이퍼가 곧바로 차세대 AI 시스템에 탑재될 수는 없는 실정이다. 전공정(웨이퍼 제조)을 마친 칩들은 최종 완성을 위해 다시 태평양을 건너 대만으로 보내져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TSMC가 보유한 독보적인 첨단 패키징 기술인 'CoWoS(Chip-on-Wafer-on-Substrate)'에 있다. AI 반도체의 성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GPU 다이(die)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하나의 패키지 안에서 고밀도로 통합해야 하는데, 현재 애리조나 공장에는 이를 수행할 수 있는 후공정 인프라가 전무하다. 즉 미국이 반도체 제조의 '심장'인 웨이퍼 생산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이를 완제품으로 만드는 '마무리 능력'은 여전히 대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미국이 추구하는 '반도체 자립'이 아직은 미완의 과제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TSMC의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2020년 발표 이후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숙련된 현지 기술 인력 부족, 장비 설치 지연, 까다로운 인허가 절차 등으로 당초 계획보다 일정이 수차례 지연되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 역시 최근 4나노 칩의 생산 시작을 확인하며 이를 미국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중대한 진전으로 평가했지만 완전한 생태계 구축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고비용에도 '안보' 우선…'기가팹'이 관건

엔비디아 입장에서 애리조나 생산 라인 확보는 전략적 필수 선택이었다. 미·중 갈등 고조와 대만 해협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존하는 상황에서 주요 정부와 빅테크 고객사들은 '안전한 공급망'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후공정을 위해 대만을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더라도 제조 원천인 웨이퍼 공급망을 미국 내에 이원화하는 것은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물론 비용 문제는 여전히 난제다. 업계 분석에 따르면 미국에서 생산되는 칩은 대만 본토 생산 대비 약 5~20%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미국의 높은 인건비와 자재비, 운영 비용이 고스란히 원가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TSMC와 미국 정부는 이러한 경제적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독립'과 '공급망 회복력(resilience)' 확보라는 가치가 추가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TSMC는 이러한 미국의 구상에 발맞추어 피닉스 단지를 '기가팹 클러스터(gigafab cluster)'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향후 단계적인 증설을 통해 미국 내에서도 첨단 패키징 공정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웨이퍼 생산부터 최종 패키징까지 미국 내에서 일괄 처리(Turn-key)가 가능해져 해외로 물량을 이송해야 하는 현재의 기형적인 구조를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이번 블랙웰 웨이퍼 초도 생산은 주식 스크리너(stock screeners)상의 수치를 넘어서는 거대한 산업적 함의를 지닌다. 수년 전 청사진에 불과했던 '미국 내 첨단 칩 제조'가 현실화됐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이다. 비록 아직은 대만과의 기술적 연결고리를 끊을 수 없는 과도기적 단계이지만, 미국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최상단 지위를 탈환하기 위한 거대한 톱니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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