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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3500억 달러 투자 '원화 계좌' 방식 협의…단계적 집행, 시장 안정 도모에 초점

통화스와프 대신 원화 예치 방안, 현금 투자 비율과 집행 시기 조율 중
한국과 미국이 3500억 달러(약 496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펀드 조성을 위해 '원화 계좌 투자' 방식을 협의 중이다. 이미지=GPT4o이미지 확대보기
한국과 미국이 3500억 달러(약 496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펀드 조성을 위해 '원화 계좌 투자' 방식을 협의 중이다. 이미지=GPT4o
한국과 미국이 3500억 달러(496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펀드 조성을 위해 '원화 계좌 투자' 방식을 협의 중이지만, 전체 투자액 중 현금으로 직접 투자할 비율을 두고 양국 입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진행 중인 한미 관세협상에서 이 같은 새로운 투자 방식이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16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함께 미국 출국 전 인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외환시장과 관련된 여러 부분에서 미국 측과 이해의 간극이 많이 좁혀졌다"고 밝혔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워싱턴DC에서 "미국이 한국의 외환시장을 이해하고 있으며 우리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통화스와프 요청에 미국 '원화 계좌' 역제안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현재 논의 중인 '원화 계좌 투자' 방식은 한국 정부가 먼저 제안한 통화스와프에 대해 미국이 내놓은 대안으로 파악된다.

통화스와프는 양국 중앙은행이 자국 통화를 미리 정한 환율로 맞바꾸는 방식이다. 반면 원화 계좌 투자는 한국 정부가 미국에 원화 계좌를 개설하고 투자 규모만큼 원화를 입금하면, 미국이 그 금액에 해당하는 달러를 마련해 투자 프로젝트에 사용하는 구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통화스와프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해온 점이 이 같은 역제안의 배경으로 풀이된다. 미 재무부는 외화안정화기금(ESF)을 활용해 한국이 예치한 원화만큼 달러를 조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미 투자를 원화로 진행하면 대규모 달러가 한꺼번에 국내에서 빠져나가면서 외환시장이 요동치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 미국이 요구해온 '전액 달러 투자'보다 한국에 유리한 측면이 있는 셈이다. 시장에서는 지난 2008년 한미 통화스와프 발표 당시 원달러 환율이 하루 만에 70원 급락했던 사례를 들어, 발표 자체만으로도 외환시장 안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단기 환율 안정 vs 중장기 원화 약세 우려


금융권 안팎에서는 이번 방식이 단기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낼 것이란 평가가 우세하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유입되고 원화 강세 압력이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시장 참여자들 사이에서는 발표 직후 원달러 환율이 현재 1400원대 중반에서 1400원대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중장기적 부담 요인도 함께 지적한다. 국내에서 직접 달러를 사들이는 전통적 방식보다 급격한 환율 급등 위험은 줄어들지만, 수백조 원 규모의 원화가 해외에 묶여 있으면서 원화 유출에 따른 약세 압력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다.

무엇보다 미 재무부 ESF의 자산 규모가 2108억 달러(299조 원)에 그쳐, 3500억 달러 전액을 이 방식으로 처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 한계로 꼽힌다. 미국은 지난 9일 아르헨티나와 200억 달러(28조 원) 규모의 유사한 방식으로 합의한 바 있다. 따라서 한국도 한꺼번에 3500억 달러를 예치하기보다 현실적 상황을 감안해 예치 금액이 순차적으로 조정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투자 형태 놓고 양국 입장차 해결해야


정부가 당면한 더 큰 과제는 따로 있다. 정부의 목표는 지난해 8월 관세협상 당시 약속한 3500억 달러 투자에서 현금으로 직접 투자하는 비중을 최소화하고, 대출이나 보증 같은 간접 지원 비율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다.

정부는 당초 3500억 달러 가운데 현금 투자는 5% 정도인 175억 달러(248000억 원) 수준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은 3500억 달러 전액을 현금으로 직접 투자하라고 요구해 양국 간 간극이 큰 상황이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원화 계좌 투자 방식과 관련해 "미국의 기존 요구보다 나아진 면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조건이 충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투자 통화가 '원화냐 달러냐'보다 '현금 투자 비율이 얼마냐'가 협상의 진짜 핵심이란 뜻이다.

수출 실적 연동한 단계별 집행 방안도 거론


업계 안팎에서는 양국이 원화 계좌에 돈을 한꺼번에 넣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나눠서 입금하는 방안을 조율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한국의 재정 부담과 외환시장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관리하면서도, 미국의 투자 확보 요구를 충족시키는 절충안이 될 수 있다는 해석이다.

통상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원화 입금 규모와 시기를 한국의 대미 수출 실적이나 무역수지 흐름, 한국 기업뜰의 대미 투자의 시기와 규모에 따라 유연하게 조절하는 방식이 거론되고 있다. 한국은 외환시장 안정을 유지하면서 투자 약속을 지킬 수 있고,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외 치적으로 내세울 투자 성과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금융권에서는 이러한 단계적 접근이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은 급격한 시중 자금 감소를 막고 국가채무가 늘어나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으며, 미국은 투자 프로젝트 진행 단계에 맞춰 안정적으로 자금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APEC 정상회담 앞두고 막판 협상 진행


한편, 정부는 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전에 협상을 마무리한다는 목표를 세워뒀지만, 일정에 쫓겨 서둘러 합의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김용범 실장은 "경주 APEC 회의가 두 정상이 만나는 기회라는 점에서 양국 협상단 사이에 이를 활용하자는 공감대는 있다"면서도 "우리 국익과 국민 이익에 맞는 방향으로 가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관련 업계에서는 대규모 원화 예치로 시중 자금이 줄어들고 국가채무가 늘어나는 문제가 장기 과제로 남을 것이란 분석도 내놓고 있다. 현재 국가채무는 1261조 원 규모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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