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베이스먼트(Debasement) 달러무제한 발행 역사의 교훈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피나를 부인으로 맞이하기 전에 세 번째 아내를 불륜이라며 처형했다. 공석이 된 황후 자리에 아들까지 둔 조카 아그리피나를 간택한 것이다. 그녀의 아들이 바로 훗날 황제에 오르는 네로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는 친아들 브리타니쿠스가 있었다. 불륜으로 처형당했던 세 번째 부인의 아들이었다. 아그리피나는 이 브리타니쿠스 대신 자신의 아들인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공작을 꾸민다. 아그리피나는 전 남편 소생인 자신의 아들 네로를 클라우디우스의 양아들로 입적시킨다. 또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를 네로와 결혼시킨다. 그런 다음 남편이자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한다. 네로는 17세 나이로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만들어준 로마의 제5대 황제가 된다.
아들을 황제에 올린 아그리피나는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정치의 모든 것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네로는 황제가 된 직후부터 이런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네로는 어려서 결혼한 전 황제의 딸 옥타비아에게 별 애정이 없었다. 옥타비아를 두고 당대 로마 최고의 미녀였던, 친구의 부인 포파이아에게 푹 빠지게 된다. 네로는 그러면서도 옥타비아와 이혼을 하지는 못했다. 적통 황녀를 내쫓기에는 적통이 아닌 네로로서는 쉽지 않았다.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이혼 반대도 큰 부담이 됐다. 네로는 이혼을 하지 못한 채 포파이아와 내연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계속 반대하자 네로는 어머니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네로는 어머니를 살해한 후 정실부인인 아내 옥타비아에게 노예와 간통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덮어씌워서 처형시켜 버린다. 네로는 어머니와 본처를 죽인 다음 내연녀 포파이아와 결혼했다.
서기 64년 7월 19일 로마에 큰불이 났다.이른바 로마 대화재(Great Fire of Rome)다. 기름 창고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화재가 시내에 옮겨붙으면서 대화재로 번졌다. 화재는 무려 6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도시가 사실상 전소해 버렸다. 이 방화의 범인으로 네로가 지목됐다. 이른바 네로 황제의 방화설이다. 사실 여부는 지금도 확인할 수 없다. 엄청난 재앙에 시민의 민심은 분노했다. 네로 황제는 민심 수습책으로 당시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모든 책임을 덮어씌웠다. 예수의 12사도를 비롯한 기독교도를 대학살했다. 기독교도를 사회 혼란 해결의 희생양으로 삼아 화형으로 대학살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네로는 최악의 폭군이 됐다.
네로는 불탄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디베이스먼트라는 무리수를 둔다. 네로는 동전에 들어가는 금과 은의 양을 줄여 금화와 은화를 이전보다 작고 얇게 만들었다. 종전보다 훨씬 더 적은 양의 금과 은을 넣었으면서도 종전과 같은 단위로 거래하도록 했다. 돈의 물리적 가치를 낮추는 조작이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디베이스먼트(debasement)'라고 부른다. 그렇게 늘어난 돈으로 로마를 다시 지은 것이다. 문제는 디베이스먼트의 후폭풍이었다. 유통되는 동전의 수가 늘어나자 동전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었다. 예전에 은화 1개로 살 수 있었던 것도 이제는 은화 2개가 필요해졌다. 돈의 가치가 하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디베이스먼트, 즉 통화 증발에 의한 인플레이션이다. 물가 폭등으로 로마 경제는 무너졌다. 시민들의 원성은 결국 네로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로마 대화재 사건 4년 만인 서기 68년 마침내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의 스페인 지역 총독 갈바(Galba)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원로원은 바로 네로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네로는 노예들과 도망치지만 결국 자결한다. 비참한 말로였다. 역대 최악의 황제 네로는 결국 디베이스먼트 때문에 무너졌다.
화폐 경제가 시작된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돈을 위조하거나 함량을 속이려고 끊임없이 시도했었다. 대표적인 디베이스먼트 기술은 클리핑(clipping)과 스웨팅(sweating)이다. 클리핑은 주화의 주변을 깎아내는 것이다. 스웨팅은 주화를 가죽 부대에 넣고 마구 비벼대 금화나 은화 가루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종교개혁 이후 교황청의 힘이 약해지면서 상대적으로 힘이 커진 군주들이 경쟁적으로 디베이스먼트에 나섰다. 백년전쟁 기간 재정난에 허덕이던 프랑스의 샤를 7세 왕은 여러 번에 걸쳐 디베이스먼트를 시도했다. 영국의 헨리 8세도 디베이스먼트로 악명이 높았다.
디베이스먼트를 막기 위해 이탈리아에서는 금전 거래 이후 금화를 곧장 주머니에 넣고 밀봉한 후 주머니를 통째로 주고받았다. 영국에서는 은화를 깎아내는 자를 체포해 처형한 뒤 그 시체를 토막 내는 일도 있었다. 디베이스먼트를 하면 단기적으로는 돈이 늘어난다. 권력자들은 그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권력을 누린다. 그러나 권력자들의 디베이스먼트는 자신들의 얼굴이 새겨진 돈의 가치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된다. 돈의 가치는 물론 권력자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기도 한다.
요즘 뉴욕증시가 뜨겁다. 주식은 물론 비트코인·이더리움·리플·솔라나·카르다노 등 가상 암호화폐와 금값·은값 등 거의 모든 상품이 오르고 있다. 이른바 에브리싱 랠리다. 미국의 대표적인 경제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를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라고 명명했다. 미국 달러화와 주요 선진국 통화의 화폐가치 하락에 대비하려는 투자자들이 금, 비트코인 또는 기타 대체 자산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높은 정부부채 부담이 지속되는 가운데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신뢰까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투자자들이 달러화 등 기축통화를 대체할 다른 안전자산을 찾아 피신하고 있다는 보도다. 미국 연방정부 재정적자와 여전히 높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연방정부의 일시적 업무정지(셧다운)마저 터지면서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는 더 가열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개인이 보유한 미국 국채의 1%만 귀금속으로 전환돼도 금 가격이 온스당 5000달러 선에 근접할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블룸버그는 금이 단순한 안전자산을 넘어 ‘법정통화에 대한 신뢰 저하’의 상징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딩의 출발이라는 지적이다. 화폐가치 하락을 회피하기 위해 금이나 비트코인과 같은 대체 자산으로 자금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물론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재정적자와 국가부채가 늘어나 재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일본·영국·프랑스 등이 특히 심하다. 화폐가치를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통화량을 늘려 그 돈으로 부족액을 메꾸려는 디베이스먼트의 유혹이 커지고 있다. 그 선두에 트럼프가 있다.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로 상당 기간 에브리싱 랠리가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것이 네로 황제가 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