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글로벌이코노믹 로고 검색
검색버튼

[실리콘 디코드] 中, 반도체 수출 통제로 유럽 압박…완성차 업계 생산 대란 오나

네덜란드 넥스페리아 수출 막자 폭스바겐·보쉬 등 공급망 '초비상'
"재고 몇 주뿐"… 팬데믹 악몽 딛고 선 유럽, 또다시 '칩 쇼크' 공포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유럽 자동차 산업의 심장부를 겨누고 있다. 중국 정부가 자국 기업이 소유한 네덜란드 반도체 회사 넥스페리아(Nexperia)의 수출을 전격 통제하면서, 폭스바겐을 비롯한 유럽 대표 완성차 기업들의 생산 라인이 멈춰 설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 시절의 반도체 대란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터진 이번 사태에 유럽 자동차 업계는 한 달 안에 닥칠지 모를 최악의 생산 중단 사태를 막기 위해 필사적인 대응에 나섰다.

16일(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유럽의 주요 자동차 제조사들은 잠재적인 생산 중단을 막고자 긴급회의를 소집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업계는 과거 반도체 부족 사태를 겪으며 재고를 늘렸지만, 이번 조치의 직접적인 대상이 된 넥스페리아 칩 재고는 몇 주 분량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졌다. 폭스바겐 AG와 세계 최대 자동차 부품사인 로버트 보쉬 GmbH 같은 기업이 대체 공급처를 확보하는 데 수개월이 걸릴 수 있어 단기적인 생산 차질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독일 전기·디지털산업협회(ZVEI)의 볼프강 베버 회장은 "정치적 차원에서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는다면, 세계 자동차 생산의 상당 부분과 수많은 다른 산업 부문에서 가동 중단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선 넥스페리아

이번 사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무역 협상 재개를 앞두고 격화하는 미·중 무역 갈등의 연장선에서 일어났다. 중국의 이번 조치는 네덜란드 정부가 비상시 필수 제품 접근성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냉전 시대 법률을 발동해 넥스페리아의 경영권을 장악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다. 넥스페리아는 지난해 말 미국의 무역 제재 명단에 오른 중국 윙테크놀로지 소유의 회사다. 양국은 무역 협상 테이블을 앞에 두고도 미국의 대중 관세와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카드 등을 주고받으며 긴장 수위를 높여왔다.

넥스페리아가 생산하는 반도체는 최첨단 기술 제품은 아니지만, 자동차의 스위치나 운전대 제어 등 기본적인 기능을 맡는 필수 부품으로 차량 한 대에 수백 개가 들어간다. 자동차 부문은 넥스페리아 전체 매출의 60% 이상을 차지할 만큼 핵심 사업이며, 지난해 매출액은 20억6000만 달러(약 2조9000억 원)에 이르렀다. 첨단 부품이 아님에도 자동차 생산에 필수적인 범용 반도체 하나가 전체 공급망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중국의 수출 통제 조치가 발표되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자동차 산업의 핵심 공급업체 가운데 하나인 독일 인피니언 테크놀로지스에는 넥스페리아의 기존 고객들로부터 대체 공급을 문의하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보통 칩을 직접 구매하기보다 보쉬나 콘티넨탈에서 분사한 아우모비오 같은 대형 부품사를 통해 반도체가 포함된 모듈 형태로 공급받는다. 이들 대형 부품사 역시 수많은 중소 협력사로부터 개별 부품을 조달하는 복잡한 공급망 구조를 갖고 있어, 이번 사태가 미칠 파장의 범위를 신속하게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TF 꾸린 폭스바겐…유럽 업계, 해법 찾기 분주


이런 가운데 넥스페리아는 고객사와 사업 협력사들에 중국의 수출 통제가 '불가항력' 사유에 해당한다며, 법적 계약 조건을 이행하지 못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지난 14일, 회사는 성명을 내고 수출 제한 조치에서 면제받기 위해 중국 당국과 협의 중이라고 밝혔으나, 그 이상의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유럽 최대 자동차 제조업체인 폭스바겐은 즉각 전략팀을 꾸리고, 주요 공급업체들과 수백 가지 부품에 미칠 잠재적 영향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폭스바겐은 "현재 생산에는 차질이 없지만, 잠재적 위험을 일찍 알아내고 필요한 조치를 결정하려고 노력한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부품사인 보쉬 역시 "전자 부품 공급업체 중 하나인 넥스페리아와 긴밀히 접촉하며 잠재적 영향을 최소화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전했다.

넥스페리아는 중국 광둥성 조립 공장을 비롯해 독일과 영국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으며,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도 조립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전 세계 1만2500명이 넘는 직원이 1초에 약 3000개의 반도체를 생산하며 세계 자동차 공급망의 한 축을 맡아왔다.

유럽자동차제조업협회(ACEA)는 현재 업계가 보유한 넥스페리아 칩 재고가 몇 주 안에 바닥날 수 있으며, 재고가 소진되면 생산 중단이 뒤따를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시그리드 드 브리스 ACEA 사무총장은 "우리는 갑자기 이처럼 우려스러운 처지에 놓였다"면서 "관련된 모든 국가가 신속하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맨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