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 실리콘밸리 재현' 베트남, 칩 설계회사 100개 도전"

2003년 베트남 출신 엔지니어들이 실리콘밸리에서 창립한 후 2007년 호치민시에 공장을 세운 회로기판 전문업체 팹9(Fab-9)의 버트 아루칸(Bert Arucan) 사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4월 중국에 145% 관세 인상을 위협한 후 일주일 만에 주문량이 20% 늘었다"고 밝혔다. 아루칸 사장은 지난해 5월 회견에서 "전 세계 고객사들과 화상회의를 하느라 매우 바빠졌다"며 "어제는 이탈리아와 화상회의를 했는데, 우리 제품을 보고 베트남에서 이런 것을 만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더라"고 말했다. 팹9는 급증하는 수요에 맞춰 새 장비를 들여놓고 생산 규모를 늘리기 위해 두 번째 건물로 확장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처음에 베트남 수출품에 46% 관세를 부과했지만, 이달 들어 20%로 낮췄다. 다만 단순히 베트남을 경유한 중국산 제품에는 40% 관세를 적용하기로 했다. 이 관세는 지난 1일부터 시행됐다.
◇ 인텔·삼성 등 글로벌 기업들도 베트남 주목
베트남 반도체 업계가 주목받는 배경에는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차단한 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대만이 세계 반도체 조립, 패키징, 테스트를 주도하고 있지만, 베트남에는 인텔, 아모코(Amkor), 온세미(Onsemi), 하나 마이크론(Hana Micron) 등 대형 칩 제조업체들의 공장이 들어서 있다. 팹9의 주요 고객사에는 인텔, 페어차일드(Fairchild), 아모코, 아날로그 디바이시스(Analog Devices) 등이 포함돼 있다.
베트남의 유일한 웨이퍼 공급업체인 베트남 웨이퍼의 호앙 롱 차우(Hoang Long Chau) 대표는 "우리 웨이퍼는 100% 베트남에서 만들어지며 중국 부품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고, 모든 원료가 베트남산"이라며 "중국과 전혀 관련이 없는 제품에 대한 수요를 충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23년부터 칩 모듈을 설계해온 베트남 기업 HSPTek의 하이 트란(Hai Tran) 회장은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폭스콘(Foxconn), 룩스셰어(Luxshare) 같은 대형 업체나 베트남 현지 제조업체에 주문을 맡길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다낭 반도체·AI센터의 푹 레(Phuc Le) 소장은 "이는 반도체 공급망에 진입할 수 있는 거대한 기회"라며 "오랫동안 보면 공급망의 소유권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히 조립용 부품을 사들일 수만은 없다"고 분석했다.
◇ 다낭 칩 설계회사 9개→23개로 급증
해외 주요 반도체 기업에서 일한 베트남 엔지니어들도 고국으로 돌아와 기술력을 접목하고 있다. 프랑스 반도체 소재업체 소이텍(Soitec), 시놉시스(Synopsys), 대만 TSMC, 삼성 등에서 일했던 전문가들이 VSAP랩(VSAP Lab)이라는 기술기업에 합류해 다낭에 7200만 달러(약 1000억 원) 규모의 첨단 반도체 패키징 연구소를 짓고 있다. 이 연구소는 해마다 1000만 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으며 고급 반도체 패키징 및 테스트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푹 레 소장은 "베트남인들이 기술을 소유하는 베트남 최초의 연구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영 군사기술 대기업 비에텔(Viettel)도 비슷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베트남 최대 민간 기술기업 FPT와 호치민시의 CT 반도체는 베트남 소유의 첫 조립, 테스트, 패키징 시설을 동시에 건설하고 있다. 베트남 웨이퍼는 쿠앙트리성의 모래 가공공장을 확장해 웨이퍼용 초순수 쿼츠를 만들고 있다. 이런 활기찬 분위기에 대해 아루칸 사장은 "지금의 베트남은 55~60년 전 실리콘밸리 같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베트남이 글로벌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높은 벽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실리콘밸리 소재 AI 솔루션 업체 에이토매틱(Aitomatic)의 크리스토퍼 쿠옹 T. 응우옌(Christopher Cuong T. Nguyen) 창립자는 "국내 기업들이 연구개발 분야의 리더가 되고 글로벌 시장에 접근하기는 매우 어렵다"며 "이를 이루려면 매우 의식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가 50년 넘게 인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인피니언 테크놀로지스 등 거대 칩 기업들의 공장을 유치했는데도 아직까지 글로벌 수준의 자국 반도체 기업이나 100억 달러(약 13조8800억 원) 이상이 드는 자체 제조시설을 갖지 못한 점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