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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하늘을 능멸하며 피는 꽃-능소화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기사입력 : 2018-06-2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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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쨍한 한낮의 햇살을 피해 그늘진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갑자기 눈앞이 환해질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담장을 타고 올라 만발한 주황색 능소화와 마주치는 순간이다. 이글거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고고하면서도 강렬한 꽃빛으로 태양과 맞서며 환하게 웃고 있는 능소화를 보면 뜨겁고 강렬한 삶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요즘 능소화가 한창이다. 옛날에는 능소화가 피는 걸 보고 장마가 시작되는 걸 알아차렸다고 한다. 일기예보 대신 꽃을 보고 시절을 읽었던 옛사람의 지혜가 놀랍고 멋스럽게 느껴진다.

능소화(凌霄花)의 ‘능소(凌霄)’는 하늘을 타고 오른다거나 하늘을 능멸한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시인은 능소화를 일러 ‘태양을 능멸하며 피는 꽃’이라 했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박완서는 “능소화가 만발했을 때 베란다에 서면 마치 내가, 마녀가 된 것 같았어, 발밑에서 장작더미가 활활 타오르면서 불꽃이 온 몸을 핥는 것 같아서 황홀해지곤 했지.”라고 ‘아주 오래 된 농담’이란 작품 속에서 매혹적인 꽃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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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능소화에 대한 추억은 내게도 있다. 수요일마다 ‘사색의향기’에서 꽃을 소재로 향기메일을 쓰고 있는데 능소화를 소재로 시를 써서 메일을 띄웠을 때였다. 시의 내용은 강대나무를 타고 올라가 꽃을 피운 능소화를 보고 나도 누군가를 꽃 피게 하고 싶다는 소망을 적은 것이었는데 대구의 한 목사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의 시를 노래로 만들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흔쾌히 승낙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사님은 곡을 붙여 직접 노래까지 부른 동영상을 보내왔다. 멋진 노래가 되어 돌아온 나의 시는 소중한 추억이 되어 가슴에 남아 있다.

능소화는 능소화과의 낙엽성 덩굴식물로 중국이 고향이다. 등나무처럼 가지에는 다른 물체에 달라붙기 쉽게 흡착근이 있어서 담장이나 벽을 타고 올라간다. 금빛 꽃을 피우는 등나무란 의미로 금등화로도 불린다.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서나 장맛비의 세찬 빗줄기 속에서도 싱그러움과 밝은 표정을 잃는 법이 없다. 더구나 시들기 전에 미련 없이 그 붉은 꽃송이를 툭, 하고 바닥에 내려놓아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지는 순간까지 고고한 기품을 잃지 않는 꽃이 능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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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한수 이북에 고향을 둔 나는 어렸을 땐 능소화를 못 보고 자랐다. 능소화는 추위에 약한 꽃나무라서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귀하던 능소화가 지금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흔한 꽃나무가 되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식물들의 자람터 한계선이 북상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양반꽃’이라 하여 여염집에서 함부로 심었다가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사람의 신분마저 갈라놓을 만큼 귀한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실명을 한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에 한때는 정원에서 쫓겨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최근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실제로는 거의 독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꽃을 보고 문학적 영감을 얻는 것도, 꽃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려 하는 것도 사람의 일일 뿐이다. 꽃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 다만 제게 주어진 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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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길을 걷다가 담장을 넘어와 초록 줄기마다 주황색 꽃등을 내어 단 능소화를 만나면 저절로 걸음이 멈춰진다. 그럴 때면 주황색 능소화가 황색등이 켜진 신호등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잠시 쉬어 가라는 삶의 쉼표 같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꽃을 보는 일은 늘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만 살았던 내게 자연이 베풀어준 최고의 휴식의 시간이다. 일본의 한 환경운동가는 “씨앗이 자라는 속도를 넘어선 곳에서는 공포만이 자랄 뿐 안심은 없다.”고 했다. 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일단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자세히 보고 오래 바라보지는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꽃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은 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설령 그렇지 못할지라도 꽃은 인간의 무례를 용서하겠지만.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백승훈 기자가 쓴 기사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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