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 "보고서·데이터 정리 자동화에 ‘경험 결핍’ 우려"
EY·시스코 등 시뮬레이션 도입…신입 교육 방식 재설계
EY·시스코 등 시뮬레이션 도입…신입 교육 방식 재설계
이미지 확대보기단순하고 지루한 ‘잡무’는 줄었지만 신입 직원들이 반복 작업과 시행착오를 통해 업무 감각을 익힐 기회까지 함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기업들이 이를 ‘경험 결핍(experience starvation)’ 문제로 보고 실제 업무를 본뜬 시뮬레이션과 역할극을 만들어 신입 직원들에게 인위적으로 경험을 쌓게 하는 새로운 교육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6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잡무 사라지자 숙련 기회도 사라져
WSJ에 따르면 과거 신입사원들은 보고서를 반복해서 작성하고 데이터를 스프레드시트에 옮기며 기본적인 업무 능력을 익혔다.
젊은 엔지니어는 코드를 계속 작성하면서 오류를 발견하는 법을 배웠고 신입 변호사는 계약서를 반복해서 작성하면서 법률의 기본 원리를 익혔다. 회계사 역시 수많은 세금 신고서를 처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고객에게 조언할 수 있는 판단력을 키웠다.
그러나 최근 기업 구조조정과 AI 도입으로 이 같은 반복 업무 상당 부분이 자동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인사관리 업체 딜의 나디아 알레이 인사담당 임원은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일정한 패턴을 배우는 과정은 중요하다”며 “이후 좋은 판단을 내리는 능력으로 발전한다”고 설명했다.
컨설팅업체 가트너는 AI 도입으로 신입 직원들이 충분한 경험을 쌓기 전에 복잡한 판단을 맡게 되는 상황을 ‘경험 결핍’이라고 표현했다.
맬러리 바그 불먼 가트너 수석 애널리스트는 “신입 직원들이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판단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복잡한 결정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입 직원 입장에서는 AI가 작성한 결과물을 검토해야 하지만 정작 무엇이 좋은 결과물이고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가려낼 경험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업무 사라지자 ‘모의 업무’ 만들어 훈련
WSJ에 따르면 기업들은 사라진 반복 업무를 다른 방식으로 되살리고 있다.
글로벌 회계·컨설팅업체 EY는 신입 직원이 실제 고객을 만나기 전에 AI를 활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까다로운 고객에게 정보를 요청하거나 자신의 제안에 반대하는 고객을 설득하는 연습을 하도록 하고 있다.
AI가 고객 역할을 맡아 직원의 제안에 반론을 제기하면 직원이 이에 대응하고 곧바로 피드백을 받는 방식이다.
네트워크 장비·IT 기업 시스코도 직원들이 고객에게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안하는 상황을 역할극으로 연습할 수 있도록 별도의 훈련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IT 서비스·컨설팅업체 코그니전트는 올해 신입 직원들을 대상으로 12주간의 부트캠프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채용한 신입 직원 약 1500명 가운데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프로그래밍과 데이터 구조 등 기본 기술을 반복해서 연습한다.
코그니전트는 올해 ‘스킬스프링’이라는 AI 기반 교육 도구도 도입했다. 직무를 세부 과제로 나눈 뒤 직원의 부족한 부분에 맞춰 실습이나 문답식 교육을 제공한다.
WSJ는 실제 업무에서 반복훈련 기회가 사라지면서 기업들이 이제 실제 일을 본뜬 ‘모의 업무’를 만들어 직원들의 경험을 보충하고 있다고 전했다.
◇로펌도 AI로 협상 연습
법률업계에서도 비슷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스탠퍼드대 로스쿨의 AI 법률서비스 연구팀은 글로벌 로펌 디처트의 여름 인턴들을 대상으로 AI 협상 시뮬레이션을 시험했다.
한 그룹은 일반적인 교육을 받고 다른 그룹은 일주일에 2시간씩 인수합병(M&A) 과정의 여러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 역할의 AI 에이전트와 협상 연습을 했다.
여름 프로그램 마지막에 실시한 모의 협상에서 최종 진출자 4명 가운데 3명이 AI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그룹에서 나왔다.
다만 연구진은 참여자 수가 적어 결과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일부 로펌에서는 선배 변호사가 후배에게 계약서 초안을 직접 고쳐주는 기존 교육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선배 변호사가 문서를 작성하도록 AI에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하는지를 후배에게 가르치는 경우가 늘고 있다.
◇“AI가 이미 내 기술 약화” 45%
직장인들도 AI가 업무 능력을 약화시킬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IBM 기업가치연구소가 직원 8800명을 조사한 결과 52%는 지난 1년 사이 일상 업무가 달라졌다고 답했으며 45%는 AI가 이미 자신의 업무 기술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답했다.
AI가 반복 업무를 대신하면서 신입 일자리 자체도 영향을 받고 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미국의 최근 대학 졸업자 실업률은 지난 6월 5.7%로 최근 5년 사이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
스탠퍼드 디지털경제연구소와 급여관리업체 ADP 자료에서도 소프트웨어 개발과 고객서비스처럼 AI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직종에서 신입 일자리가 가장 큰 폭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수술 로봇이 먼저 보여준 ‘경험 결핍’
이 같은 문제는 AI가 등장하기 전 의료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외과 수련의들은 과거 선배 의사의 수술을 반복해서 보조하면서 직접 손으로 수술 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로봇 수술이 확산하면서 숙련된 외과의가 로봇으로 정밀 작업을 혼자 처리할 수 있게 됐고 수련의들이 수술 과정에서 직접 경험할 기회는 크게 줄었다.
맷 빈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타바버라 교수 연구에 따르면 로봇 수술이 확산된 뒤 일부 수술 과정에서 수련의의 실제 시술 경험은 이전보다 10~20배 줄었다.
성공적으로 기술을 익힌 일부 수련의들은 로봇을 사용하지 않는 외과의가 있는 다른 부서에서 배우거나 수백 시간을 추가로 시뮬레이션 훈련에 쓰면서 부족한 경험을 보완했다.
빈 교수는 이러한 현상이 투자은행과 스타트업 등 다른 산업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AI 확산으로 더욱 광범위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업들이 직면한 과제는 단순 업무를 없애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AI로 생산성을 높이면서도 신입 직원들이 훗날 복잡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충분한 반복 경험과 시행착오를 어떻게 제공할지가 새로운 인재육성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WSJ는 지적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