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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후티 반군과 사우디 네옴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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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전 고려대 교수
호루무즈에 이어 이번에는 홍해가 위험하다. 홍해의 요충지 바브엘만데브 해협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이 사태를 단순히 ‘이란의 대리전’이나 ‘종파 분쟁’이라는 피상적 틀로만 재단하는 것은 지정학적 본질을 외면하는 처사다. 외부 세력의 지원만으로 독립적인 장기전을 수행할 동력과 대중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무장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후티가 과시하는 군사적 역량과 정치적 생명력의 진정한 발원지는 아라비아 반도 북쪽,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궁이다.
사우디 건국의 아버지 이븐 사우드 국왕은 임종 당시 “사우디의 안정은 예멘의 불행에 달렸다”는 유훈을 남겼다. 사우디는 광대한 영토와 석유 자원을 지녔으나 인구가 적은 반면, 남단의 예멘은 척박하지만 풍부한 인구와 오랜 전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왕실의 시각에서 남부 국경에 강력한 통일 국민국가가 들어서는 것은 그 자체로 악몽이었다.

사우디는 1934년 전쟁을 통해 예멘의 국경 영토를 병합한 이래, 예멘의 중앙집권화를 집요하게 방해했다. 그 핵심 도구가 ‘예멘 특별위원회’였다. 사우디 왕실은 비밀 위원회를 통해 매년 수십억 달러의 오일머니를 예멘 북부와 동부의 부족장들에게 직접 건넸다. 중앙정부의 국고를 우회해 유력 인사들에게 살포된 이 뇌물은 예멘의 공권력이 지방으로 뻗어 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완벽한 쐐기 역할을 했다.결과적으로 예멘은 정상적인 근대 국가로 도약하지 못한 채, 사우디의 자금에 기생하는 부패한 부족 세력과 무기력한 중앙 권력이 공존하는 ‘기능 부전 국가’로 묶였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대목은 ‘와하비즘(Wahhabism)의 강제적 이식’이었다.예멘 북부 산악 지대는 천년 넘게 시아파의 온건 분파인 자이디파(Zaydi)가 터전을 일궈온 지역이다. 자이디파는 수니파와의 교리적 괴리가 작아 역사적으로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1962년 공화정 혁명 전까지 예멘을 통치했던 자긍심 높은 지배 엘리트의 뿌리였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막대한 자본을 쥔 사우디는 엄격하고 배타적인 수니파 근본주의 와하비즘을 국경 너머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사우디는 자이디파의 본산인 사다(Saada) 주에 오일머니를 쏟아부어 대규모 살라피 종교학교인 ‘다르 알하디스’를 세웠다. 무료 숙식과 장학금으로 빈곤층 청년들을 포섭한 이들은 자이디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전통 묘역을 파괴하는 등 문화적 테러를 감행했다. 북부 주민들에게 이는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니라, 천년간 이어온 고유한 정체성과 실존을 말살하려는 외세의 문명적 침공이었다.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1990년대 초 후세인 바드렛딘 알후티가 조직한 청년 문화 운동 ‘믿는 청년들(알샤밥 알무민)’이 오늘날 후티의 모태다. 초기에는 여름 캠프를 열고 고유문화를 지키려던 평화적 자구 운동이었으나, 사우디의 지속적인 종교 침탈과 중앙정부의 탄압에 맞서 점차 급진적인 정치·군사 저항 집단으로 진화했다. 후티 운동의 본질은 외부의 사주가 아닌, 사우디의 공격적인 와하비즘 침략에 맞선 토착 사회의 방어적 반작용이었던 셈이다.

사우디는 33년간 예멘을 철권통치한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을 대리인 삼아 후티 세력을 무력 진압하려 했다. 살레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사우디의 지원에 의존했고,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사다 지역을 겨냥해 6차례의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2004년 초대 지도자 후세인 알후티가 정부군에 사살되었으나 운동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동생 압둘말릭 알후티가 잔존 세력을 규합했고, 정부군의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은 중립적이던 북부 부족들마저 후티의 기치 아래로 집결시켰다.

2009년 제6차 전쟁 당시 사우디 정규군은 예멘 영내를 직접 폭격하며 참전했으나, 험준한 산악 지형을 이용한 후티의 게릴라 전술에 밀려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사우디와 살레의 무력 탄압은 후티를 소탕하기는커녕,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종교 청년 단체를 고도의 실전 경험과 전투력을 갖춘 정예 군단으로 단련시켜 준 역설적인 훈련장이 되었다.2011년 ‘아랍의 봄’으로 살레가 축출 위기에 몰리자, 사우디는 또다시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기 위해 ‘GCC 중재안’을 내놓았다. 살레에게 면책특권을 주는 대신 허수아비 부통령 하디를 과도 대통령에 앉힌 것이다.

후티와 혁명 세력을 배제한 채 출범한 하디 정권은 극심한 경제난과 실정을 거듭했다.민생이 파탄 나자 후티는 ‘부패 척결’을 내세우며 사나로 진격했고, 2014년 9월 무혈입성으로 수도를 장악했다. 망명한 하디가 구원을 요청하자, 사우디는 2015년 3월 대규모 공습을 개시하며 전면전에 뛰어들었다. 최신 서방제 무기로 무장한 연합군이 봉쇄를 지속하면 수개월 내에 반군이 굴복할 것이라는 치명적 오판이었다.연합군의 무차별 공습과 해상 봉쇄는 2천만 명이 넘는 예멘인을 기아와 참상으로 몰아넣었다. 이는 북부 주민들에게 ‘외세 침략자 사우디’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항전 의지를 촉발했다. 결과적으로 후티에게 북부 예멘을 일원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절대적인 정치적 정당성을 쥐여주었다.
사우디와 서방은 후티를 ‘이란의 꼭두각시’라 부르지만, 인과관계는 정반대다. 역사적으로 자이디파는 이란의 12이맘파와 신학적 결이 달랐으며, 2014년 사나 점령 당시만 해도 이란의 개입은 미미했다. 후티를 이란의 품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은 하늘과 바다를 틀어막고 폭격을 퍼부은 사우디 자신이었다. 생존의 벼랑 끝에 선 후티에게 이란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저비용의 드론 기술과 탄도미사일 부품을 밀수망으로 공급했고, 예멘 전선은 이란에게 최고의 ‘가성비’ 안보 투자처가 되었다. 사우디가 값비싼 미국제 요격 미사일로도 막지 못하는 자폭 드론에 심장부 아람코 시설이 피격당하는 비대칭 역전극이 벌어졌다.

사우디는 남부 국경에서 친이란 세력을 제거하겠다며 전쟁을 일으켰으나, 10년의 전쟁 끝에 정밀 타격 능력을 갖춘 정예 친이란 무장 정권을 턱밑에 영구히 정착시켜 주는 참담한 전략적 패배를 자초했다. 이보다 완벽한 자기모순적 자업자득은 찾기 힘들다. 2023년 사우디는 중국의 중재로 이란과 국교를 복원하고, 사나로 대표단을 보내 후티와 종전 협상에 나섰다. ‘토벌 대상’이던 반군을 사실상의 통치자로 인정하며 고개 숙인 것은 자국 정책의 파산을 자인한 행위다. 5천억 달러를 들여 건설 중인 ‘네옴 신도시’와 ‘비전 2030’ 프로젝트가 후티의 미사일 한 발에 좌초할 수 있다는 현실적 공포가 왕실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오일머니로 밀어붙인 와하비즘의 예멘 침탈은 평화롭던 공존의 질서를 깨뜨렸다. 오늘날 후티가 표출하는 호전성은 사우디의 종교적 제국주의가 낳은 뒤틀린 자화상이다.

사우디와 후티의 충돌은 홍해 통항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홍해의 수에즈 운하 의존이 높은 우리로서도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닌 것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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