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뉴욕발 충격파, ‘솔리다임 분리 상장’이 던진 뇌관
SK하이닉스의 새로운 핵심 캐시카우로 부상한 낸드플래시 자회사 솔리다임(Solidigm)이 미국 뉴욕 증시 단독 상장을 전격 추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국내 자본시장에 거대한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이 같은 분리 상장이 현실화할 경우, 그동안 SK하이닉스 주가를 밀어 올렸던 초고용량 eSSD 독점 효과와 실적 프리미엄이 한순간에 증발하고 모회사는 심각한 ‘지주사 할인(Holding Company Discount)’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투자자들 사이에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쪼개기 상장의 저주이다.
로이터 통신은 복수의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SK하이닉스의 미국 낸드 자회사 솔리다임이 이르면 2027년 뉴욕 증시 기업공개(IPO)를 목표로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을 불러 주관사 선정을 위한 제안 설명회, 이른바 ‘베이크오프(Bake-off)’에 본격 착수했다고 전격 타전했다. 더욱 경악스러운 대목은 로이터가 전한 솔리다임의 추정 기업가치다. 월가에서 거론되는 몸값은 최대 1,500억 달러, 한화로 무려 200조 원을 웃도는 천문학적인 규모다. 이는 2023년 나스닥에 데뷔했던 반도체 설계 자산 기업 암(Arm)의 밸류에이션(약 540억 달러)을 세 배 가까이 뛰어넘는 것으로, 성사될 경우 미국 반도체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초대형 상장이 될 전망이다. 공모 규모만 해도 약 150억 달러(약 20조 원)에 이를 것으로 관측된다.
시장은 발칵 뒤집혔다. 수년간의 혹독한 반도체 빙하기와 조 단위 누적 적자를 함께 버텨내며 비로소 역대급 실적의 결실을 맛보려던 SK하이닉스 주주들의 눈앞에, 핵심 알짜 자회사를 뚝 떼어내 월가의 잔칫상에 올리는 ‘글로벌 쪼개기 상장’의 악령이 드리운 것이다. 과연 이 거대한 자본 실험은 SK의 기업가치를 비약시키는 마법의 한 수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한국의 믿음직했던 반도체 주주들을 또 한 번 절망으로 몰아넣는 비정한 배신극의 서막인가. 지금 글로벌 반도체 시장과 여의도 증권가의 모든 시선이 솔리다임의 행보에 쏠리고 있다.
솔리다임의 기원과 인텔의 숨은 유산
‘솔리다임(Solidigm)’이라는 이름은 단단한 물리적 반도체 저장장치를 뜻하는 ‘솔리드 스테이트(Solid-State)’와, 특정 시대를 지배하는 체계나 인식의 틀을 뜻하는 ‘패러다임(Paradigm)’의 유기적 합성어다. 끝의 ‘g’는 묵음 처리되어 ‘솔리다임’으로 발음된다. 2021년 12월 공식 출범 당시 회사가 대외적으로 선언했듯, “기존 스토리지 산업의 낡은 관성을 깨부수고 솔리드 스테이트 기술 혁신을 통해 데이터 저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확립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 탄생했다.
솔리다임의 뿌리는 실리콘밸리의 상징이자 현대 반도체 산업의 설계자였던 인텔(Intel)의 낸드플래시(NAND Flash) 및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사업부다.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CPU)의 절대강자로 군림해 왔으나, 비휘발성 메모리 분야에서도 대단히 독특하고 고집스러운 기술 계보를 지니고 있었다. 반도체 메모리는 전원이 차단되면 데이터가 지워지는 휘발성 D램과, 전하를 절연체에 가두어 데이터를 영구 보존하는 비휘발성 낸드로 양분된다. 낸드 셀(Cell)에 전하를 저장하는 방식에서,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다수 메모리 기업들은 공정이 수월하고 셀 간 간섭이 적은 전하포획형(CTF, Charge Trap Flash) 구조를 택했다. 반면 인텔은 전통적인 플로팅 게이트(Floating Gate) 방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도전체인 폴리실리콘 게이트 안에 전자를 물리적으로 가두는 플로팅 게이트 기술은 고적층으로 갈수록 공정 난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고 두께 제어가 까다롭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대다수 제조사들이 CTF로 깃발을 바꿔 달 때, 인텔은 플로팅 게이트 고유의 완벽한 전하 차단력과 절연 특성을 극한까지 파고들었다.
이 외로운 기술적 집착은 훗날 상상치 못한 반전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셀에 1비트를 저장하는 SLC에서 MLC(2비트), TLC(3비트)를 지나 마침내 셀 하나에 4비트(16개 전압 상태)를 정밀하게 담아내야 하는 QLC(Quadruple Level Cell) 시대로 접어들었을 때, 인텔의 플로팅 게이트는 CTF 대비 압도적인 누설 전류 방지 능력과 데이터 보존 신뢰성을 입증한 것이다. 솔리다임은 바로 이 인텔의 집요한 유산과 엔터프라이즈(기업용) 스토리지 컨트롤러 아키텍처를 고스란히 승계한 순수 혈통의 기술 집약체였다.
90억 달러의 도박: SK하이닉스의 인수와 참혹했던 ‘승자의 저주’
2020년 10월, SK하이닉스는 대한민국 M&A 역사상 최대 규모인 90억 달러(당시 한화 약 10조 3,000억 원)를 투입해 인텔의 낸드 및 SSD 사업 부문을 통째로 사들이겠다고 발표했다.당시 SK하이닉스의 포트폴리오는 심각한 불균형 상태였다. D램에서는 확고한 글로벌 2위였으나, 낸드플래시 점유율은 10% 안팎에 머물렀고 모바일용 저부가가치 제품에 편중돼 있었다. 고마진과 대규모 물량을 보장하는 서버·데이터센터용 기업용 SSD(eSSD) 시장은 삼성전자와 인텔이 양분하고 있었다. 최태원 회장과 경영진은 인텔 낸드 인수를 통해 단숨에 글로벌 낸드 시장 2위로 올라서고, 취약했던 eSSD 경쟁력을 단번에 확보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졌다.
계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잔인한 현실이 닥쳤다. 2021년 말 1단계 인수를 마무리하고 자회사 솔리다임을 출범시켰으나, 곧바로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집어삼킨 유례없는 ‘메모리 빙하기’가 도래했다. 코로나 특수가 꺼지며 IT 기기 수요가 급감했고, 빅테크 기업들은 데이터센터 투자를 전면 동결했다.낸드 가격은 생산 원가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솔리다임은 2022년과 2023년 연속으로 조 단위의 대규모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모회사인 SK하이닉스마저 2023년 한 해에만 7조 7,000억 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 영업손실을 기록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매 분기 막대한 현금을 태워 없애는 솔리다임은 시장과 언론으로부터 ‘돈 먹는 하마’, ‘승자의 저주’라는 가혹한 낙인을 피하지 못했다.
“왜 기울어가던 인텔의 레거시 사업부를 비싼 값에 인수해 그룹 전체의 유동성을 위협하는가”라는 비판이 빗발쳤고, 증권가 일각에서는 솔리다임의 청산설과 사업 매각설까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챗GPT가 촉발한 생성형 AI 혁명은 글로벌 데이터센터의 아키텍처를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기존 데이터센터는 비용 절감을 위해 방대한 데이터를 보관할 때 하드디스크 드라이브(HDD)를 사용하고, 빠른 처리가 필요한 영역에만 TLC SSD를 배치해 왔다. 그러나 인공지능 시대의 데이터센터는 차원이 다른 물리적 한계에 직면했다. 수만 대의 엔비디아 GPU가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는 AI 클러스터에서 데이터 공급 속도가 지연되면 비싼 GPU가 멍하니 노는 병목 현상이 발생한다. 더 큰 재앙은 ‘전력’과 ‘물리적 상면(공간)’이었다. 데이터센터에 들어갈 수 있는 서버 랙과 허용 전력 한계는 고정되어 있는데, 크고 전력을 많이 먹는 HDD로는 수십 페타바이트(PB)에 달하는 AI 훈련·추론 데이터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절대적 난제를 해결한 구원투수가 바로 솔리다임의 고용량 QLC eSSD였다.인텔 시절부터 축적해 온 플로팅 게이트 기반 3D QLC 기술 덕분에, 솔리다임은 경쟁사들이 16TB, 30TB 제품에 머물러 있을 때 단일 드라이브에 무려 61.44TB를 집적한 초고용량 eSSD(모델명 D5-P5336)를 세계 최초로 양산 공급하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최근에는 이를 두 배로 끌어올린 122TB급 eSSD까지 시장에 선보였다.
효과는 압도적이었다. AI 데이터센터에 솔리다임의 초고용량 QLC eSSD를 적용하면 기존 HDD 대비 전력 소모를 최대 80% 이상 절감하고, 소요 상면을 5분의 1 이하로 압축할 수 있다. 전력난과 데이터센터 부지 부족에 시달리던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빅테크들은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60TB 이상 초고용량 eSSD 시장에서 솔리다임의 점유율은 사실상 100%에 달하는 독점 체제를 구축했다.SK하이닉스는 AI 인프라 생태계의 완벽한 양대 축을 장악했다. 두뇌의 초고속 연산을 보좌하는 메모리는 SK하이닉스의 HBM이, 거대한 지식과 데이터를 보존하는 스토리지는 솔리다임의 QLC eSSD가 완벽하게 통제하게 된 것이다. 만년 적자의 늪에 빠져 있던 솔리다임은 2024년 극적인 흑자 전환에 성공하며, SK하이닉스 낸드 사업 전체를 견인하는 최고 수익성의 캐시카우로 탈바꿈했다.
뉴욕 증시 상장(IPO)과 불거진 ‘최태원의 배신論’
그러나 기적 같은 기술적 승리와 화려한 턴어라운드의 결실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한국 자본시장은 거대한 배신감에 휩싸였다. 로이터가 보도한 ‘솔리다임 뉴욕 증시 단독 상장 추진’ 소식 때문이다.최대 1,500억 달러(약 200조 원) 밸류에이션, 공모 금액 150억 달러라는 장밋빛 숫자가 뉴욕 월가를 뒤흔드는 동안, 국내 투자자들은 참담한 기시감에 치를 떨고 있다. 이것이 바로 ‘최태원의 배신論’이 터져 나온 진원지다.
SK하이닉스 주주들은 지난 4년간 피눈물을 흘렸다. 10조 원이 넘는 인수 대금을 치르느라 회사의 차입금은 치솟았고, 솔리다임이 낸 수조 원의 적자는 고스란히 SK하이닉스의 연결 재무제표를 갉아먹었다. 주주들은 주가 폭락과 배당 축소의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며 회사를 지탱했다.이제 막 AI 특수를 타고 황금알을 낳기 시작하자, 알짜 중의 알짜 사업부를 미국 법인이라는 이유로 뚝 떼어내 뉴욕 증시에 단독 상장하겠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이 수없이 반복하며 자본시장을 교란했던 ‘물적분할 후 쪼개기 상장’의 글로벌 변종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솔리다임이 미국 증시에 상장되면 글로벌 투자자들은 굳이 한국 시장에 상장된 SK하이닉스 주식을 살 필요가 없어진다. 인공지능 스토리지의 가장 강력한 순수 수혜주(Pure-play)인 나스닥의 솔리다임을 직접 매수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모회사 SK하이닉스는 솔리다임의 실적과 성장성을 지분 가치로만 간접 보유하게 되며, 한국 시장 특유의 지주사 할인율이 가혹하게 적용되어 주가가 억눌리는 구조적 함정에 빠질 위험이 크다.솔리다임은 한국 기업 SK하이닉스의 자본과 인내로 회생시킨 기업이다. 그러나 상장의 무대가 뉴욕이 되고 대규모 신주 발행이 이루어지면, 막대한 공모 자금과 미래 지분 가치의 상당 부분이 고스란히 미국 기관투자자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물론 SK하이닉스 측은 중국 다롄 팹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산하고, 미국 내 첨단 낸드 생산 시설 구축을 위한 막대한 설비투자(CAPEX) 재원을 현지에서 조달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미국 정부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압박에 굴복해, 한국 주주들의 피땀으로 키운 과실을 미국 시장에 헌납하는 꼴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영광의 왕관 뒤에 남겨진 자본의 책임
솔리다임의 드라마틱한 부활은 글로벌 반도체 역사상 가장 눈부신 역전극 중 하나다.버려졌던 인텔의 비주류 기술 플로팅 게이트는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격변을 만나 데이터센터를 지배하는 최고의 보물로 거듭났다. 솔리다임은 기술적으로 완벽한 ‘SSD의 황제’이며, 그 가치를 알아보고 조 단위 적자를 견뎌낸 경영적 결단 역시 기술사적으로는 찬사를 받을 만 하다. 그러나 기술의 영광이 주주의 신뢰를 짓밟는 순간, 자본주의의 정당성은 흔들린다. 1,500억 달러라는 화려한 밸류에이션 축포 뒤편에서, 한국의 주주들은 또다시 지배주주의 자본 재배치 게임에 들러리를 선 것은 아닌지 깊은 배신감을 곱씹고 있다.
솔리다임의 상장이 진정으로 SK하이닉스의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신의 한 수가 될 것인지, 아니면 알짜 자회사를 팔아 미국 시장의 환심을 사고 한국 주주들을 기만한 또 하나의 흑역사로 기록될 것인지. 이제 최태원 회장과 SK그룹 수뇌부가 답해야 할 차례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