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방산기업 라인메탈의 급부상과 프랑스 등 서유럽의 불안, 미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현실주의 세력균형 복귀 선언, 그리고 한국이 마주한 새로운 선택의 지형
이미지 확대보기유럽의 전장 바깥에서 독일 방위산업을 대표하는 기업 라인메탈의 이름이 다시 부각되는 것은 단순한 기업 성장의 문제가 아니다. 전후 독일이 평화국가라는 신념 아래 묶어두었던 군사 능력의 봉인이 풀리고 있으며, 유럽 전체는 러시아의 침공, 미국의 전략 변경, 나토 확장 논쟁이 뒤엉킨 현실주의 세력균형으로의 귀환 시대의 문 앞에 서 있다. 이 흐름의 바탕에는 서방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추구해온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 대전략의 근본적 실패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실패의 결과로 촉발된 전쟁이 유럽 재무장을 불러왔으며, 그 중심에 독일이 다시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 국제 질서의 구조적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
유럽의 주요 증권시장에서 방산주는 이미 새로운 성장 산업으로 취급받고 있다. 독일은 전후 처음으로 국방비를 대규모로 증액했고, 유럽 각국은 전쟁 이후 잊고 있던 장기 재무장의 논리를 다시 꺼내들어 자국 산업을 전면 재정비하고 있다. 라인메탈의 급성장은 바로 이 구조적 전환의 가장 상징적 장면이며, 그 이면에는 서방 전략 엘리트가 외면했던 현실주의적 세력균형의 복귀가 자리 잡고 있다.
평화국가 독일에서 유럽 재무장의 중심 국가로
독일은 수십 년 동안 군사적 절제와 평화주의를 국가 정체성의 중심에 두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 정체성을 근본에서 흔들었고, 독일은 더 이상 전후 합의에 기대어 안보를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의 나토 방위비 증액 요구가 겹치면서 독일의 군사 재건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독일은 더는 방산을 주변 산업으로 다루지 않고 전략산업의 중심에 놓기 시작했다. 라인메탈은 이 변화의 산물이며 동시에 그 원동력이 되었다.
라인메탈이 유럽 재무장의 상징으로 떠오른 이유는 단순한 생산 능력 확대 때문이 아니다. 독일이 유럽의 군사 생태계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전후 유럽이 수십 년 동안 유지해온 전략 균형이 해체되고 있다는 사실이 라인메탈이라는 기업의 성장 곡선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럽에게 기회이자 위험이며, 미국의 전략 재조정과 함께 세계 안보 구조를 다시 쓰기 시작한 일련의 변화다.
서유럽의 불안과 프랑스의 두려움, 그리고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오판
독일의 급부상은 프랑스에게 깊은 불안을 안겨주고 있다.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유럽 방산 통합을 주도해 왔으나 정치적 이견과 산업 기반의 제약으로 실질적인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 독일은 재정과 생산 역량을 기반으로 유럽 재무장의 중심을 장악했고, 라인메탈은 유럽 육상 전력 공급망의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프랑스의 불안은 단순한 산업 경쟁력 약화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유럽 전체가 수십 년 동안 미국과 함께 추구해온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역풍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방은 러시아를 서구식 자유주의 국가로 개조하려는 완전한 승리를 목표로 삼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편입 시도는 그 전략의 연장선이었다. 그러나 이는 러시아의 안보 딜레마를 극대화했고, 결국 전면 침공이라는 극단적 반작용을 불러왔다.
오늘의 유럽 재무장은 단순한 러시아 대응이 아니라, 서방 전략의 오판을 바로잡기 위한 필요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다. 프랑스가 독일 중심의 방산 구조가 강화되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도 산업 경쟁을 넘어 전후 유럽의 권력 균형이 무너지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미 블룸버그 통신은 12월9일 보도에서 미 금융기관 모건스탠리의 애널리스트들이 독일의 추가 국방비 지출 승인 기댐감 속에서 유럽의 방산 기업들 주가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독일 전차와 장갑차 제조업체인 라인메탈을 최우선 추천 종목으로 제시했다. 통신은 향후 12개월동안 라인메탈의 주가가 50% 이상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덧붙일정도로 독일 방위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대전략의 전환과 현실주의 세력균형의 귀환
자유주의 패권이라는 대전략의 실패로 인한 독일 방산이 급성장하는 유럽의 재무장을 중심으로 한 이 같은 국제 질서의 흐름은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본지 글로벌이코노믹은 지난달부터 워싱턴과 브뤼셀을 향해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폐기와 현실주의적 세력균형으로의 복귀를 촉구해 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단순한 외교적 비평을 넘어 구조적 전환을 요구하는 의제 제기였다. 그 후 개최된 레이건 국방포럼에서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은 자유주의 패권이라는 대전략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고, 미국의 힘을 재조정해 세력균형 중심 전략으로 복귀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는 미국이 더는 전 세계를 자유주의 질서로 재편하려는 과거의 전략을 지속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유럽에 대한 미국의 안전보장 역할이 변화할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유럽이 독자적 방위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독일의 재무장은 그 흐름의 첫 번째 실체적 장면이다.
유럽의 억지력 공급망을 장악한 독일의 새로운 위치
라인메탈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의 주요 억지력 공급업체로 자리 잡았다. 독일은 탄약과 전차, 장갑차 생산을 대규모로 확대했고, 나토는 장기 억지력 유지를 위한 탄약 비축을 상시 강화하고 있다. 이로써 독일은 단기간에 유럽 전력 생산의 중심국이 되었고, 라인메탈은 유럽 안보를 지탱하는 핵심 기업으로 떠올랐다.
이 변화는 단순한 산업 성장의 차원을 넘어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독일이 전력 생산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자 유럽 내부에서 유지되던 권력 구조는 독일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프랑스를 비롯한 주요 국가들에게 구조적인 긴장을 유발하고 있으며, 유럽 통합 프로젝트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자유주의 패권 대전략이 남긴 상흔과 새로운 현실주의 세력균형 질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자유주의 패권 전략이 얼마나 위험한 전략적 오판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서방은 러시아의 전략적 요구를 과소평가했고, 나토 동진을 통해 러시아를 체제 전환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접근은 러시아의 극단적 반발을 불러왔고, 유럽은 전후 가장 큰 안보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오늘 유럽이 재무장에 나서는 이유는 단순히 러시아의 위협 때문만이 아니다. 자유주의 패권 전략이 만든 구조적 불안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실주의적 세력균형을 회복하려는 필연적 흐름이 그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 유럽은 다시 힘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으며, 각국은 독자적 억지력을 강화하는 길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한국이 마주한 새로운 선택의 장
유럽의 재무장은 동아시아에도 중요한 함의를 남긴다. 미국이 전략적 자원을 재배분하는 과정에서 동맹의 지위와 개입 강도는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은 더 이상 연합 억지력만으로 안보를 보장받기 어렵고, 독자적 억지력과 방산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심화된다.
또한 유럽 방산 기업의 부상은 한국 방산 기업의 글로벌 경쟁 지형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장기 계약과 역내 재무장을 기반으로 유럽 기업들의 생산 능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된다면, 한국의 시장 진출과 전시 조달에도 제약이 커질 수 있다. 한국이 방산을 국가전략 산업으로 재배치하고 기술 자립 능력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주의 세력균형 시대의 문 앞에서 한국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독일의 재무장, 프랑스의 불안, 미국의 전략 전환, 러시아의 침공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시대가 끝나고, 힘과 억지가 국제질서의 중심으로 돌아오는 현실주의적 질서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라인메탈의 부상은 그 시대적 전환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한국은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택을 미룰 수 없다. 억지력의 자립, 기술의 자율성, 방산 산업의 전략화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 생존의 조건이다. 변화가 우리를 시험하기 전에, 먼저 변화의 중심에 서서 전략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세계 질서가 현실주의적 세력균형으로 이동하고 있는 지금이 바로 한국이 독자적 전략국가(a strategic nation)로 도약해야 할 순간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