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LNG 수입 의존 90%… 현물 조달 비용 급등 시 반도체·석유화학 직격
IMF "유가 충격 후 고용 회복에 5년"·OECD "아태 GDP 0.95% 손실"… 아시아 직격
"공급 부족 아닌 구매력 배분 위기"… 부채 폭탄 뇌관 터지면 금융위기 도미노
IMF "유가 충격 후 고용 회복에 5년"·OECD "아태 GDP 0.95% 손실"… 아시아 직격
"공급 부족 아닌 구매력 배분 위기"… 부채 폭탄 뇌관 터지면 금융위기 도미노
이미지 확대보기국제통화기금(IMF)은 유가 급등 이후 에너지 집약적 수입국에서 고용 충격이 5년 이상 지속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유가가 배럴당 135달러를 유지할 경우 아시아·태평양 GDP가 0.95% 줄어들 것으로 경고했다. FT·IMF·OECD 분석을 종합하면, 이번 사태의 본질은 공급 총량 부족이 아니라 구매력이 없는 나라는 아예 시장에서 밀려나는 '이중 배급 체제'의 현실화다.
이미지 확대보기"마카티 식당가는 적막, 다카 주유소는 폐쇄"… 멈춰 서는 아시아 경제
'에너지 배급제'는 더 이상 전시(戰時) 비유가 아니다. 필리핀 마닐라 금융 중심지 마카티의 식당 '고토 몬스터' 계산원 세드릭 곤잘보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최근 몇 주 사이 손님이 40%가량 줄었다"며 실직 우려를 털어놨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에너지 절약을 위한 재택근무를 권고하면서 직장인 유동 인구가 증발한 결과다.
방글라데시에서는 타리크 라만 총리조차 집무실 전등 절반을 끄고 에어컨 가동을 제한하며 절약에 앞장섰다. 국영 에너지 기업 페트로방글라는 주유소에 하루 4시간 강제 급유 중단을 지시했다. 다카의 차량 공유 기사 소헬 사르커는 "하루 15번 운행하던 것을 이제는 문을 연 주유소 찾기에 다 허비한다"며 "내일 당장 기름을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이번 '에너지 배급제'의 성격은 세 층위가 동시에 작동하는 이중(二重) 배급 체제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행정 배급으로, 정부가 직접 전력·연료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가격 배급으로, 시장 가격이 너무 높아 사실상 구매 자체가 차단된다. 셋째는 물리적 배급으로, 인프라 마비나 물류 차질로 공급이 물리적으로 닿지 않는 경우다. 지금 개발도상국이 직면한 것은 이 세 가지가 동시에 겹치는 최악의 조합이다.
이미지 확대보기1970년대 오일쇼크와 무엇이 다른가… "이번엔 공급 총량 문제가 아니다"
1970년대에는 산유국 카르텔이 물리적 공급 자체를 줄여 전 세계가 동시에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급 총량이 급격히 줄지 않았다. 문제는 장기 공급 계약 비중이 축소되고 현물 시장(스팟 마켓) 거래 비중이 커지면서 실시간 입찰 능력이 에너지 접근의 결정적 변수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특히 액화천연가스(LNG)는 파이프라인 가스와 달리 선박으로 운송이 가능해 구매력이 높은 곳으로 물량이 쏠리는 '글로벌 경매' 구조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2024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LNG의 83%, 원유의 84%가 아시아로 향했다. 이 물량을 받는 국가 중 상당수는 현물 시장에 의존하는 중위소득 국가들이다. 홀거 슈미딩 베렌베르크은행 수석 경제학자는 "미국은 에너지 자급이 가능하고 유럽은 부유해 웃돈을 치르고라도 에너지를 확보할 여력이 있다"며 "문제는 입찰 경쟁에서 밀려나는 가난한 수입국들"이라고 지적했다.
구조적으로 에너지 집약도(경제 단위당 에너지 소비량)가 높은 국가일수록 충격은 가파르다. 금융·서비스 중심인 벨기에와 달리 태국·필리핀처럼 제조업과 수출 비중이 큰 국가는 경제 생산 단위당 에너지 소모량이 훨씬 많다. 필리핀의 경우 GDP 대비 에너지 수입 비중이 6~8%에 달해 유가 상승이 경기 둔화로 직결되는 구조다.
수요 파괴·고용 붕괴·외환 고갈… 3단계 충격의 해부
에너지 가격 급등은 단순한 물가 자극을 넘어 수요 파괴(Demand Destruction) 단계로 이미 진입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1단계는 소비 위축과 수요 파괴다.
소비자가 지갑을 닫으면 기업 매출이 줄고, 기업은 투자를 멈추며, 정부는 고갈되는 외환보유액을 방어하기 위해 성장 목표 자체를 포기한다. IMF 연구에 따르면 유가 충격은 에너지 집약적 수입국에서 심각하고 장기적인 고용 손실을 불러온다. 유가가 급등한 시점으로부터 5년이 지나도 인구 대비 고용 비율이 0.45%포인트 낮은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나타났다.
2단계는 외환 고갈과 국채 매각이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각국 정부가 에너지 수입 대금을 결제할 목적으로 국채와 금을 매각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잠비아는 연료 공급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유류세를 전격 감면했지만, 물류 차질로 항공유와 등유 가격은 이달에만 50% 이상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브래드 세서 미국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보조금으로 가격 인상을 억제하는 방식은 근본적인 공급 부족 상황에서 소비자가 적응할 기회를 박탈하는 단기 처방일 뿐"이라고 경고했다.
3단계는 부채 위기 폭발이다.
클레멘스 그라프 폰 루크너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연구원은 "지금 모든 정책 입안자는 진퇴양난의 처지"라며 "고유가가 지속되면 보조금 재원 확보를 위해 쌓아온 부채가 결국 국가 부채 위기로 폭발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개도국 정부의 '트릴레마'… 어떤 선택을 해도 비용이 발생한다
OECD는 2026년 2분기까지 유가가 배럴당 평균 135달러(약 20만 원)를 유지하는 비관 시나리오에서 글로벌 GDP가 기준치 대비 0.5%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타격은 0.95%로 유럽(0.75%)을 크게 웃돌 것으로 분석된다.
완충 요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중동 사태가 조기 봉합될 경우 유가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고, 산유국들의 증산 결정이나 미국의 전략 비축유 방출도 단기 가격 압력을 낮출 변수다. 또한, 일부 중위소득 국가들은 이미 장기 공급 계약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재편 중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응책이 실효를 거두기까지 적어도 수개월의 시차가 불가피하다는 점이 문제다.
에너지 수입 의존 90%… 한국은 안전한가
이번 위기가 아시아 중위소득 국가만의 문제라는 인식은 오해다. 한국은 에너지 자급률이 5% 수준에 불과하며 LNG 수입 의존도는 세계 최상위권이다. 장기 계약 물량으로 단기 충격을 완충하고 있지만, 현물 조달 비중이 높아질수록 비용 압박이 커진다.
전력·반도체·석유화학 등 에너지 집약 산업이 한국 수출의 근간을 이루는 만큼, LNG 현물 가격이 상승할 경우 제조 원가 압박이 전방위로 확산될 수 있다. 국내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현재는 장기 계약 물량이 방패 역할을 하고 있지만, 중동 사태가 장기화하면 계약 갱신 시 가격 협상력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 차원에서는 에너지 수입 다변화(미국 LNG 직도입 확대, 호주·카타르 계약 비중 조정)와 함께 전력 수요 관리 고도화, 재생에너지 전환 가속이 중장기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재생에너지 비중이 아직 10% 초반대에 머물고 있어 단기 공급망 충격에 대한 완충 능력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가격'이 아니라 '힘'이 자원을 배분하는 시대가 온다
에너지 배급제의 확산은 단순한 위기 대응이 아니다. 이는 세계 경제가 가격 메커니즘이 아니라 구매력과 지정학적 위치가 자원 배분을 결정하는 새로운 질서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1970년대 오일쇼크가 에너지 효율화와 대체에너지 투자를 촉진해 결국 세계 경제 구조를 바꿨듯, 이번 위기 역시 에너지 공급망의 근본적 재편을 압박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한국을 포함한 에너지 수입국의 정책 당국이 지금 당장 점검해야 할 체크포인트는 세 가지다. ① 호르무즈 해협 통과 물량의 일일 변동과 LNG 현물 가격 추이, ② 필리핀·방글라데시 등 아시아 신흥국의 외환보유액 감소 속도, ③ 국제 신용평가사의 에너지 취약 개도국 신용등급 조정 여부다. 이 세 지표가 동시에 악화할 경우, 에너지 위기는 금융위기와 지정학 리스크가 서로를 증폭시키는 복합 충격으로 전환될 수 있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