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 비싼 HBM 대신 우회 설계·압축 알고리즘 개발 속도전
삼성·SK하이닉스, 공급자 넘어 ‘시스템 아키텍처 파트너’ 전환 시급
삼성·SK하이닉스, 공급자 넘어 ‘시스템 아키텍처 파트너’ 전환 시급
이미지 확대보기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5년 장기 공급 계약(LTA)을 무기로 실적 변동성 타파에 나섰으나 빅테크 기업들의 기술적 우회라는 암초를 만났다.
고대역폭메모리(HBM) 가격 폭등과 공급 부족에 직면한 고객사들이 메모리 사용량 자체를 줄이는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장기 계약이 수요를 고정하는 시대가 아니라 기술이 수요를 줄이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장기 계약 자물쇠조차 수요를 완전히 잠그지 못할 수 있다는 신중론이 월가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비싸면 깎아낸다… 빅테크 변칙 설계의 역습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26일(현지시각) 메모리 부족 사태가 심화할수록 거대 기술기업들의 메모리 독립 시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공급 절벽에 내몰린 고객사들이 거액의 보증금을 감수하며 장기 계약을 맺고 있지만, 동시에 의존도를 낮추는 기술적 돌파구를 찾는 양면 작전을 구사한다는 진단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메모리 다이어트'는 인공지능(AI) 연산량은 유지하면서 메모리 사용량만 줄이는 구조를 뜻한다. 모델 경량화와 연산 활성화(Activation) 데이터 압축, 키-값 캐시(KV Cache) 최적화 등을 통해 동일한 AI 연산을 수행할 때 필요한 메모리 요구량 자체를 물리적으로 깎아내는 방식이다.
실제 모바일 칩 선두 주자인 퀄컴은 투자자 설명회에서 HBM 의존도를 낮춘 고대역폭 컴퓨팅 기술을 전면에 내세웠다. 공정 난도가 높고 단가가 비싼 HBM 대신 기존 메모리 구조의 효율을 극대화해 비용을 아끼겠다는 구상이다.
AI 칩 스타트업 세레브라스 역시 첫 실적 발표에서 HBM을 배제한 거대 칩 설계를 강점으로 제시했다. 시장 최대 큰손인 엔비디아마저 차세대 AI 플랫폼 ‘베라 루빈’의 설계를 변경해 메모리 탑재량을 줄이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이 발표한 압축 알고리즘 ‘터보퀀트’ 역시 이러한 흐름을 가속하는 요인이다. 데이터 처리당 필요한 메모리 사용량 증가율이 둔화한다면 메모리 업계가 장담한 수요 총량은 어긋날 수밖에 없다.
역대급 86% 마진율, 구조적 안착인가 일시적 정점인가
배런스는 마이크론이 고점과 저점을 오가던 실적 순환 주기를 타파하기 위해 강력한 공급자 우위 시장을 활용하고 있다고 지난 26일 보도했다. 마이크론은 현재 전체 매출의 약 40%를 장기 계약 구조에 묶었으며 이 비중을 과반까지 늘릴 계획이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는 장기 계약의 가격 하한선이 과거 호황기 최대 분기 총이익률인 61%를 웃돌 것이라고 자신했다. 마이크론이 제시한 이번 분기 총이익률 지침은 86%에 이른다.
월가에서는 이를 기반으로 마이크론의 주가수익비율(PER) 재평가 가능성을 제기한다. 프랑스 BNP파리바의 칼 애커맨 분석가는 마이크론이 장기 계약을 통해 변동성을 완화하고 이익 지속성을 증명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금융정보업체 팩트셋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마이크론의 이익 체력 개선이 확인되면서 월가 분석가 42명 중 35명이 내년도 실적 전망치와 목표주가를 일제히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공장 증설 물량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풀리는 2027~2028년에는 수급 균형이 깨질 수 있다. 푸투룸의 롤프 불크 분석가는 공급 과잉 국면에서 빅테크의 메모리 다이어트 기술이 완성되면 장기 계약의 구속력 자체가 재협상 도마 위에 오를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삼성·SK하이닉스, ‘시스템 아키텍처 파트너’로 진화해야
이 같은 기술 우회 움직임은 국내 반도체 양사에도 단순한 단가 인상을 넘어 수주 전략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엔비디아 공급망을 선점하며 LTA 중심 구조를 구축한 SK하이닉스는 단기 수요 부침을 방어할 체력이 있으나 장기적인 수요 총량 감소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반면 상대적으로 범용 제품 비중이 높은 삼성전자는 빅테크의 칩 설계 변경 흐름을 반영해 맞춤형 고성능 메모리 수주 체질로 신속히 전환해야 하는 압박이 커졌다.
국내 반도체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들이 단순한 HBM 공급자를 넘어 '시스템 메모리 아키텍처 파트너'로 진화해야 독점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제언한다.
고객사의 자체 주문형반도체(ASIC) 설계 단계부터 깊숙이 개입해 HBM과 차세대 메모리인 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CXL), 고용량 DDR5를 패키지로 묶어 제안하는 맞춤형 솔루션 능력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이다. 증권가에서는 국내 기업들 역시 포트폴리오별 장기 계약 비중을 정교하게 다듬어 고점 이후의 변동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 변곡점에서 투자자가 주시해야 할 펀더멘털 지표
메모리 산업의 구조적 격변기 속에서 투자자들이 자산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지표는 HBM의 평균판매가격(ASP) 상승률과 칩당 탑재량 증가율의 상대적 추이다. 가격이 오르더라도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의 칩당 메모리 탑재량 증가율이 이를 받쳐주지 못하고 꺾인다면, 시장 전체의 수요 총액이 동반 하락하는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빅테크 기업들이 실제로 데이터센터 가동 과정에서 메모리 절약 알고리즘을 얼마나 가파르게 도입하는지도 핵심 관전 지점이다.
구글의 터보퀀트 같은 압축 소프트웨어가 실제 서버 인프라에 적용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메모리 기업들이 확보한 장기 계약의 단가 하한선 밴드는 시장 공급 과잉 시점에서 재협상 압박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마이크론과 한국 기업들의 신규 공장 증설 물량이 시장에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2027년을 전후한 글로벌 생산 능력 가동 시점을 확인해야 한다.
빅테크의 메모리 다이어트 기술이 완성되는 시점과 반도체 공급 과잉 국면이 맞물릴 경우 시장 멀티플의 하락 압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까닭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