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장비사 CEO 일제히 "역대급 호황"…과거와 다른 AI발 수요 '자신감'
ASML·도쿄일렉트론, 2년 뒤 시장 정점 확신…'버블' 경계 속 韓 기업엔 '양날의 검'
ASML·도쿄일렉트론, 2년 뒤 시장 정점 확신…'버블' 경계 속 韓 기업엔 '양날의 검'
이미지 확대보기2026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슈퍼 사이클'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이 업계를 뒤덮고 있다. 과거 3~5년 주기로 반복됐던 '실리콘 사이클'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공지능(AI)이 촉발한 거대하고 지속적인 수요가 마침내 도래했다는 선언이다. 세계 주요 반도체 제조 장비(SME) 기업 최고경영(CEO)들이 3분기 호실적을 발판 삼아 일제히 '역대 최고' 수준의 호황을 공언하고 나섰다.
하지만 업계가 '슈퍼 사이클'이라는 단어를 다시 꺼내 드는 순간, 시장은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소환할 수밖에 없다. '장밋빛 전망'이 절정에 달했을 때 어김없이 찾아왔던 혹독한 불황의 그림자다. 과연 이번 AI발(發) 수요는 과거의 과열과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장비사 CEO들의 '입'에 담긴 자신감의 실체와, 그들이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을지 모를 리스크를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14일(현지시각) 닛케이에 따르면 이날까지 집계된 미국, 유럽, 일본의 10개 핵심 장비 기업의 3분기(7~9월, 일부 8~10월) 실적은 이들의 낙관론에 일차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합산 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19% 증가한 93억 달러(약 13조 5600억 원)로, 6분기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다. 특히 AI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최첨단 장비를 공급하는 기업들의 성과가 두드러졌다.
CEO들의 '확신', 그 근거와 이면
이는 단순히 한 기업의 희망 섞인 전망이 아니다. AI 반도체 시장의 '선행 지표'로 불리는 네덜란드 ASML의 태도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 ASML은 차세대 AI 반도체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독점 공급한다. 크리스토프 푸케 CEO는 불과 3개월 전 "2026년 성장을 확약할 수 없다"던 신중론에서 벗어나, 최근 "2026년 매출이 2025년 수준을 밑도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입장을 180도 바꿨다.
HBM용 검사 장비 시장을 주도하는 어드밴테스트 역시 2026회계연도(2027년 3월기)까지의 중기 매출 목표를 최대 2750억 엔(약 2조 5955억 원)이나 상향 조정했다. 엔비디아라는 강력한 수요처를 기반으로 고성능 장비 판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이들의 자신감은 표면적으로는 타당하다. 생성형 AI 패권을 잡기 위한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천문학적인 데이터센터 투자 경쟁은 '진짜' 수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수요는 AI 연산을 맡는 로직 반도체는 물론, HBM이라는 고부가가치 메모리 시장으로까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CEO들의 이러한 '확신에 찬 발언'은 시장의 기대를 관리하고 투자 심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고도로 계산된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들의 낙관론이 현실화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명확하다. 빅테크의 AI 투자가 향후 2년간 지금과 같은 과열 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HBM 등 신규 공정의 수율과 공급량이 시장의 폭발적 수요를 차질 없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날 경우, 2026년의 '정점'은 '환상'으로 끝날 수 있다.
'슈퍼 을'의 호황…한국 반도체엔 '양날의 검'
이번 장비사들의 호황은 특히 한국 반도체 산업에 복합적인 시사점을 던진다. ASML(EUV), 도쿄일렉트론(식각·증착), 어드밴테스트(HBM 테스터) 등 특정 분야를 사실상 독과점하고 있는 이른바 '슈퍼 을(乙)'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실적 호조는 곧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과 차세대 파운드리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들의 장비를 확보하려 치열한 '구매 전쟁'을 벌이고 있음을 방증한다. AI 시대의 반도체 경쟁은 곧 '누가 먼저, 더 많이 최신 장비를 확보하느냐'의 싸움이 됐다.
이는 한국 기업들에게 명백한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이들 장비사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기술 초격차를 유지할 기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극도로 심화됨을 의미한다. 장비사들의 공급 능력과 가격 정책에 따라 우리 기업들의 투자 전략과 수익성이 좌우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SCREEN홀딩스의 고토 마사토(後藤正人) 사장이 "메모리 슈퍼 사이클이 본격화되는 것은 2026년 하반기"라고 콕 집어 언급한 것 역시, HBM 증산을 위한 세정 장비 등 관련 투자가 내년 하반기 집중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고평가·규제·레거시…발목 잡는 '리스크'
물론 시장이 낙관론에만 취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이코스모증권의 사이토 카즈요시 수석 애널리스트의 지적처럼, 빅테크 간 경쟁이 출혈로 이어져 실적이 악화될 경우 투자 계획은 언제든 급감속할 수 있다.
미국의 대중국 수출 규제 역시 거대한 변수다. 3분기 기준 이들 장비사 매출의 평균 35%가 중국에서 발생했다. 규제 강화로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 수요가 꺾일 경우, '슈퍼 사이클'의 한 축이 무너질 수 있다. 사이토 애널리스트는 "규제 영향에 따라 장비사 간의 승패가 갈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화려한 AI 스포트라이트 뒤에 가려진 '레거시(성숙) 반도체' 시장의 부진도 현실적인 위협이다. 스마트폰, PC, 전기차(EV)용 전력 반도체 등 전통적인 수요처의 회복은 여전히 더디다. 2025년 하반기는 첨단 AI와 부진한 레거시 사이의 '단경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어드밴테스트의 PER(주가수익비율) 54배, 도쿄일렉트론 31배라는 높은 주가 수준은 이미 시장의 기대가 한계치까지 차올랐음을 보여준다. 2026년의 '슈퍼 사이클'이 또 한 번의 '버블'로 기록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들 기업이 현재의 고평가된 가치를 뛰어넘는 압도적인 '성장'을 실제로 증명해내야만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