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조선업 부활' 구상에 한국 기술력으로 화답
안보 동맹 넘어 경제안보 협력으로…국내 산업 기반 약화 우려도
안보 동맹 넘어 경제안보 협력으로…국내 산업 기반 약화 우려도

우리 정부가 제안한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MASGA)'라는 사업명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를 본뜬 것으로, 그의 관심을 끌려는 우리 측의 치밀한 준비를 엿볼 수 있다. 서울 동대문의 한 모자 제작업체에서는 성조기와 태극기, 그리고 이 문구가 새겨진 빨간 모자를 만들기도 했다. 심기대 모자 팩토리 대표는 "모자를 만드는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모습을 보고 협상이 잘되기를 바랐다"며 "작은 일이었지만 큰일에 요긴하게 써서 기쁘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초 양국은 관세 협상의 기본 틀에 합의하며 한국산 선박에 대한 25% 전면관세 위기에서 벗어나 일본과 같은 15%의 완화된 세율을 확보했다. 그 대신 우리나라는 1500억 달러(약 207조 원) 규모의 '한미 조선산업 협력기금' 조성을 약속하고, 미국 내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군함 등의 생산에 우리의 설계와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다.
◇ 기회와 위험 사이, 엇갈리는 전문가 진단
이번 협력을 두고 전문가들의 시각은 기대와 신중론으로 나뉜다. 홍진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 경제안보 연구원은 "우리 기업들이 미국의 방산과 상업 선박 시장으로 확장하고, 미국 공급망의 핵심 동반자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평가했다. 그는 LNG 운반선과 군함 생산 확대, 미 해군과 협력하는 대규모 사업을 통해 우리의 세계적인 경쟁력을 한층 발전시킬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반면 섣부른 낙관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신형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미국이 우리나라에 먼저 도움을 청한 것은 반가운 일"이라면서도 "우리가 '장밋빛 꿈'을 꾸기에는 이르다. 이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대박' 기회가 될지는 알 수 없다"고 짚었다.
협력 구상 뒤에는 양국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거래를 따지는 동맹관계'를 내세우며 무역 흑자, 방위비 분담금 증액,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 같은 민감한 문제로 우리를 압박해왔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은 중국을 포용하는 외교를 지향해 워싱턴의 대중국 견제 흐름과 결이 다르다. 이번 조선 협력 카드는 이런 갈등 요소를 피해가려는 전략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안호영 전 주미대사는 "중요한 현안이 많은 매우 어려운 시기"라며 "두 정상이 원만하게 해결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 세계 최강 한국 조선업과 중국의 부상
미국이 우리나라에 손을 내민 이유는 뚜렷하다. 세계 시장을 압도하는 우리의 조선업 경쟁력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세계 최대 조선소인 HD현대중공업이 있는 울산이 있다. 한때 '현대 공화국'이라 불렸던 이 도시는 우리 조선업의 살아있는 역사다. 2002년 파산한 스웨덴 조선소에서 단돈 1달러에 사들여 '말뫼의 눈물'이라 부르는 골리앗 크레인은 이제 우리 조선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기술력은 이미 미국 현지에서 증명했다. 2024년 한화그룹은 1억 달러(약 1385억 원)를 투자해 필라델피아의 '필리 조선소'를 인수, 우리 기업 최초로 미국 조선소를 소유했다. 한화는 첨단 장비와 정교한 설계, 제조 기술을 이전해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있으며, 이 대통령은 정상회담 뒤 이곳을 찾아 '한미 조선협력의 상징'으로 내세울 예정이다.
반면 1980년대 보조금 폐지 이후 쇠락한 미국 조선업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1%를 밑돈다. 미 회계감사원(GAO)은 미 해군이 예산과 기한을 맞춰 군함을 대량 건조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은 세계 최대 해군을 보유한 중국의 빠른 성장과 맞물려 미국의 안보 위기감을 높인다. 오미연 랜드연구소 한국 석좌는 "미국 혼자서는 중국과 경쟁할 수 없다"며 우리나라나 일본 같은 동맹국과 한정된 공동생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브라이언 클라크 허드슨 연구소 연구원도 "대만 해협 같은 곳에서 문제가 생길 때 미국은 '원정팀' 처지이므로 역내 동맹국의 수리, 정비 능력이 꼭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한미일 조선 협력은 사실상 중국을 강력하게 견제하는 구도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 타임스'가 이를 의식해 "자국 우선순위를 희생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 것도 같은 까닭이다.
화려한 청사진 뒤에는 현실의 제약과 우려가 함께 있다. 울산, 거제 같은 국내 조선 산업단지에서는 미국으로 투자가 확대되면 국내 일자리와 투자가 줄어들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 HD현대중공업 근처의 한 약사는 "우리 기술과 체계를 미국으로 가져가면 울산은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고 걱정했다.
미국의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조항 역시 우리 기업이 일을 전부 맡는 것을 막는 장벽이다. 협력은 '미국 조선소-우리나라 기술 합작'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정상회담은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의 보호무역과 방위비 갈등 문제를 '조선 협력 카드'로 풀어가려는 중대한 시도다. 협력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우리 조선업계는 미국 군수·상업 시장에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고 한미 동맹은 '안보'를 넘어 '산업'이 결합된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술 유출 위험과 국내 산업 기반 약화, 그리고 중국과 관계가 나빠져 외교적으로 어려워지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이번 선택이 우리 조선업에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줄지, 아니면 국내 기반을 흔드는 독이 든 성배가 될지는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양국 정상의 손에 달렸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