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국별 투표 결과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으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10개국이 찬성표를 던졌고 독일과 헝가리 등 5개국이 반대표를, 나머지 12개국은 기권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EU 규정상 기권표는 찬성표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EU 집행위의 대중국 관세 인상안이 부결되려면 27개 회원국 투표에서 EU 전체 인구의 65% 이상을 대표하는 15개 이상 회원국의 반대표가 필요했지만 이에 미치지 못해 반대 움직임을 주도한 독일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EU의 대중 폭탄관세 부과안이 확정되면서 중국의 보복 조치가 가시화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인 가운데 EU 회원국들의 이번 투표 결과는 유로존 맹주로 위세를 떨쳐왔던 독일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음을 보여준 비근한 사례라는 분석이 제기됐다고 로이터 통신이 7일 보도했다.
◇ 올라프 숄츠 총리, 큰 정치적 타격 불가피
독일이 EU 집행위의 대중 관세 조정안에 대해 줄곧 반대 입장을 밝혀온 것은 중국 시장에 수출하는 물량이 매출의 3분의 1를 차지하는 독일 자동차 업계의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16년간 독일을 이끌면서 독일을 유로존 최대 경제강국으로 끌어올린 앙겔라 메르켈 총리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올라프 숄츠 총리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독일의 영향력이 과거와 같지 않음을 숄츠 총리가 이번 투표를 통해 확인해준 결과만 됐기 때문이다.
이번 투표는 독일의 위상이 내려앉았음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EU의 향후 행보에도 먹구름을 드리웠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유럽 싱크탱크 유로인텔리전스는 이번 투표 결과에 대한 분석 보고서에서 “독일과 대다수 나머지 EU 회원국들이 이번 문제로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인 것은 EU가 출범했을 때부터 내세운 목적, 즉 회원국 간 차이를 뛰어넘어 비EU 회원국들의 압력에 공동 전선을 구축해 함께 대응하는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 독일의 불안한 '신호등 연정'도 큰 배경
EU가 제정한 ‘기업의 지속가능한 공급망 실사지침(CSDDD)’이 지난 7월 25일 공식 발효되는 과정에서 독일과 나머지 EU 회원국 간 이견이 심각하게 표출됐기 때문이다.
이 지침은 매출 규모에 따라 적용을 받는 기업들에 대해 모기업은 물론이고 자회사와 공급망 안에 있는 협력사까지 포함해 환경과 인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위험 요인을 실사하고, 방지·개선 조처를 취한 뒤 그 결과를 모니터링하고 공시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EU 회원국의 대다수는 이 지침의 시행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으나 독일은 친기업 정당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자유민주당(FDP)의 반대 목소리가 크게 작용해 이 지침의 채택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로이터는 “색깔이 서로 달라 ‘신호등 연정’으로 불리는 사회민주당(SPD), 녹색당, FDP로 구성된 독일의 연정 체제가 독일이 대외적으로 힘 있고 단일한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고 전했다.
독일 공영 ZDF방송이 지난 6월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일 국민의 71%가 현행 연정이 국정을 잘못 운영하고 있다고 밝힌 것으로 나타난 것이 이와 무관치 않은 맥락이다.
EU 정책전문 싱크탱크 유럽개혁센터(CER)의 자크 마이어스 부소장은 “EU의 대중국 관세 인상안이 회원국 간 투표에서 독일의 반대에도 가결된 것은 유로존 맹주로 통해 왔던 EU 통상정책에 미치는 독일의 영향력이 크게 쇠퇴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