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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반도체 열전 (52) 오라클...S&P의 저주 "신용등급 추락"

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전 고려대 교수  이미지 확대보기
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전 고려대 교수
[김대호 진단 반도체열전] (52) 빚으로 쏘아 올린 AI 요새: 오라클은 왜 위험천만한 하이퍼스케일러로 변신했는가
잘 나가던 오라클에 비상이 걸렸다. 신용평가 회사가 오라클의 신용등급을 대폭 하향조정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2026년 7월 9일 목요일 오후 1시 57분(미 동부 시각), 뉴욕 채권시장의 트레이더 단말기 화면에 일제히 붉은색 긴급 속보가 번쩍였다. 글로벌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발간한 평정 보고서였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세계 소프트웨어 제국의 상징이자 한때 월가에서 가장 윤택한 현금을 쥐고 흔들던 오라클(Oracle)의 장기 발행자 신용등급을 종전 ‘BBB’에서 투자적격 등급의 맨 밑바닥인 ‘BBB-’로 한 단계 강등한다는 결정이었다.

‘BBB-’라는 점수는 시험으로 치면 낙제 바로 직전의 턱걸이 턱이다. 여기서 딱 한 칸만 더 떨어지면 은행이나 투자자들이 “여기는 돈 떼일 위험이 큰 회사”라며 돈을 빼버리는 ‘정크(쓰레기·투기)’ 등급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진다.평가사가 점수를 깎은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챗GPT를 만드는 오픈AI 같은 인공지능(AI) 기업들을 손님으로 받겠다며, 회사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빚을 내어 땅을 사고 비싼 반도체 칩을 사들였기 때문이다.오라클의 총 빚은 무려 1,3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80조 원에 달한다. 한 해에 벌어들이는 돈보다 컴퓨터를 사고 공장을 짓는 데 나가는 돈이 수십조 원이나 더 많다.

경쟁자인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은 수십조 원의 진짜 현금을 통장에 쟁여두고 최고 신용점수를 유지하고 있다. 아마존 역시 본업에서 매일 엄청난 돈을 쓸어 담는다. 유독 오라클만 대형 클라우드 기업 중 재정 상태가 가장 나쁘고, 언제 망가질지 모를 위험천만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프로그램만 팔아도 손쉽게 떼돈을 벌던 오라클은 왜 신용등급까지 깎여가며 이런 위험한 길을 택했을까?
프로그램만 팔며 배불렀던 10년의 나태함

오라클이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지 알려면, 먼저 이 회사가 마주했던 실존적 공포를 보아야 한다.1977년 문을 연 오라클은 기업의 비밀 장부나 고객 정보를 보관하는 ‘데이터베이스’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세계를 지배했다. 은행, 통신사, 병원, 대기업 등 세상의 모든 회사가 오라클 프로그램 없이는 하루도 장사를 할 수 없었다. 기업들은 장부가 날아가면 큰일 나니 오라클이 달라는 대로 비싼 프로그램 값과 관리비를 매년 상납했다. 기계를 만들 필요도 없이 프로그램 사용권만 팔아도 돈이 쏟아져 들어오니, 오라클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오만하고 부유한 왕국이었다.

잘나가던 오라클에 악재가 생겼다. 2000년대 후반 ‘클라우드’라는 태풍이 불어온 것이다. 클라우드는 쉽게 말해 기업들이 컴퓨터를 직접 사서 회사 창고에 두지 않고, 아마존 같은 대기업의 거대한 컴퓨터 방을 인터넷으로 빌려 쓰는 방식이다.기업들은 비싼 오라클 프로그램을 사는 대신 클라우드로 우르르 떠났다. 그때 오라클의 창업자 래리 엘리슨 회장은 “클라우드는 그냥 지나가는 유행일 뿐”이라며 비웃었다.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따라갔지만 이미 10년이나 늦은 뒤였다. 처음에 오라클이 급하게 내놓은 클라우드는 속도가 너무 느려 고객들의 비웃음만 샀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시장을 독식하는 동안, 오라클은 ‘과거의 영광에 취해 시대에 뒤처진 공룡’으로 전락했다. 이대로 가다간 굶어 죽을 판이었다.

쪼개 쓰던 방을 없애고 ‘통째로 빌려주는’ 승부수
벼랑 끝에 몰린 오라클은 2016년, 판을 뒤집기 위해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컴퓨터 기술자들을 거액에 모셔왔다. 이들이 내놓은 해법은 뜻밖이었다. 경쟁사들의 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기존의 클라우드는 거대한 컴퓨터 서버 한 대를 소프트웨어 기술로 잘게 쪼개어 여러 손님에게 나누어 빌려주었다. 마치 큰 아파트 한 채를 고시원처럼 여러 방으로 쪼개 세를 놓는 것과 같다. 이 방식은 싸고 편리하지만, 옆방 손님이 무거운 게임을 돌리면 내 방 컴퓨터까지 버벅거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오라클은 이 방식을 과감히 버렸다. 쪼개서 빌려주지 않고, 컴퓨터 본체를 한 손님에게 아예 통째로 빌려주는 방식을 기본으로 삼았다. 방을 나누는 복잡한 프로그램을 싹 걷어내자, 컴퓨터 안에 꽂혀 있는 반도체 칩 본래의 무시무시한 연산 속도가 그대로 터져 나왔다. 인터넷 신호를 주고받는 일도 컴퓨터 두뇌(CPU)가 직접 하지 않도록, 통신만 전담하는 특수 반도체를 따로 달아 짐을 덜어주었다. 컴퓨터 두뇌가 오직 고객의 일에만 100% 집중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얄팍한 소프트웨어 눈속임을 버리고, 반도체 칩의 진짜 힘으로만 승부하는 완전히 새로운 컴퓨터 방을 지은 셈이다.

엔비디아의 마음을 사로잡은 ‘초고속 통신 도로’

이 뚝심 있는 변화는 2022년 말 인공지능(AI) 붐이 터지면서 대박을 쳤다. AI를 학습시키려면 엔비디아의 고성능 반도체(GPU) 수만 대를 한꺼번에 연결해 엄청난 양의 글과 그림을 공부시켜야 한다. 이때 가장 큰 문제는 칩 하나하나의 속도가 아니다. 수만 대의 칩들이 서로 대화할 때 길이 막혀 생기는 ‘교통 체증’이다. 천재 만 명을 한자리에 모아놓았는데, 복도가 좁아 서로 서류를 주고받지 못해 멍하니 서 있는 것과 같다. 오라클은 칩끼리 곧장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전용 초고속 고속도로를 미리 닦아두고 있었다.
다른 회사들의 클라우드는 수천 대의 AI 칩만 연결해도 길이 막혀 칩들이 일을 멈추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라클은 3만 대, 6만 대가 넘는 엔비디아 칩을 연결해도 신호가 뻥뻥 뚫렸다. 지연 시간도 눈 깜짝할 틈의 수백만 분의 1초 수준으로 줄였다. AI 반도체의 황제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 회장이 “오라클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AI 컴퓨터를 지었다”며 엄지를 치켜세운 이유다. 챗GPT를 만드는 오픈AI 등 유명 AI 스타트업들이 아마존을 떠나 오라클로 몰려들었다. 오라클의 인프라를 쓰면 칩들이 쉬지 않고 일해 AI 훈련 비용을 20~30%나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라클은 장사하는 방식에서도 꾀를 냈다. 보통 클라우드 회사들은 손님이 다른 회사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고, 데이터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 비싼 수수료를 물린다. 뒤처졌던 오라클은 정반대의 작전을 썼다. 라이벌인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을 찾아가 “당신들 건물 안에 우리 오라클 컴퓨터 서버를 직접 들여놓게 해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적의 안방에 오라클 컴퓨터를 설치하자 손님들은 환호했다. 손님들은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의 클라우드 화면을 보면서 클릭 한 번으로 오라클의 빠른 프로그램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두 회사의 컴퓨터가 같은 건물 안에서 굵은 전선으로 직접 연결되어 있어 속도도 번개처럼 빨랐다. 오라클은 전 세계에 수조 원을 들여 비싼 건물을 짓지 않고도, 경쟁사의 건물을 빌려 타고 들어가 전 세계에 자기 서비스를 파는 영리한 전술을 성공시켰다.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살얼음판 위의 도박

이 눈부신 성공의 뒤편에는 감당하기 힘든 빚더미가 쌓여 있다. 과거 프로그램만 팔던 시절의 오라클은 빚 없이 현금이 넘쳐나던 부자였다. 하지만 거대한 컴퓨터 방을 직접 빌려주는 ‘하이퍼스케일러’가 된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수만 평의 땅을 사고, 전기를 끌어오고, 한 장에 수천만 원 하는 엔비디아 AI 칩을 수만 장씩 사서 채워 넣어야 하는 무거운 장치 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S&P가 신용등급을 깎아내린 것은 오라클을 향한 시장의 서늘한 경고다.

만약 전 세계의 AI 열풍이 식어버리거나, 빚을 내서 사들인 수십조 원어치의 AI 컴퓨터들이 제때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오라클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진짜 쓰레기 등급으로 추락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회사에 돈을 빌려줄 곳이 사라져 크게 휘청거리게 된다. 그럼에도 여든이 넘은 승부사 래리 엘리슨 회장은 멈출 생각이 없다. 반도체 칩과 진짜 컴퓨터 기계를 쥐지 못한 소프트웨어는 결국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는 소작농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왕국의 안락한 의자를 박차고 나와, 막대한 빚을 진 채 가장 거친 반도체 하드웨어 전쟁터로 뛰어든 오라클.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살얼음판 위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위험천만한 변신은, 빅테크 역사상 가장 아찔하고도 대담한 반도체 패권 도전기다.오라클의 변신은 테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담대한 도전이지만, 동시에 가장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다.소프트웨어 제국 시절의 오라클은 '무차입에 가까운 탄탄한 재무제표'와 '천문학적인 잉여현금흐름'을 누리던 실리콘밸리의 귀족이었다. 하이퍼스케일러로의 전환은 회사의 체질을 '현금을 쏟아내던 기업'에서 '자본을 블랙홀처럼 집어삼키는 중후장대 장치산업'으로 송두리째 바꿔놓았다.S&P가 단행했던 'BBB-' 강등은 오라클이 짊어져야 할 리스크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글로벌 AI 투자 거품이 꺼지거나 엔비디아 GPU 확보에 쏟아부은 수백억 달러의 설비투자가 현금 회수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오라클은 투기 등급 강등과 차입금 롤오버 실패라는 거대한 금융 리스크의 덫에 걸려 질식할 수 있다.

여든이 넘은 래리 엘리슨은 물러서지 않는다. 하드웨어와 반도체 인프라를 직접 장악하지 못하는 소프트웨어는 결국 거대 하이퍼스케일러들의 소작농으로 전락한다는 냉혹한 산업의 법칙을 뼈저리게 체감했기 때문이다.소프트웨어 황제의 안락한 왕관을 벗어던지고, 천문학적인 빚을 짊어진 채 가장 거친 반도체와 실리콘 인프라의 전장으로 뛰어든 오라클. 신용평가사의 서슬 퍼런 칼날 위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하이퍼스케일러 변신은 현대 반도체 및 테크 전쟁사에서 가장 숨 막히는 역습이자,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가장 거대한 베팅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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