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다양한 직종의 일자리가 영향을 받고 있는 가운데 AI가 모든 직업을 대체하지는 않더라도 일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특히 업무가 단순작업 위주인 경우 AI가 그 핵심을 대체할 수 있지만, 전문성과 판단력이 요구되는 직업의 경우 오히려 남은 업무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영국 경제 칼럼니스트 팀 하포드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낸 기고문에서 ‘AI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을 직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AI가 바꾸는 일의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같은 업무라도 AI 도입 후 ‘운명’ 달라져
MIT의 데이비드 오토와 닐 톰슨 연구팀이 발표한 최신 논문 ‘전문성’에 따르면 과거 단순 계산과 기록 정리가 중심이던 회계사와 재고관리직은 모두 컴퓨터 자동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회계사는 반복적 수작업에서 벗어나 시나리오 모델링과 리스크 분석 등 전략적·창의적 업무에 집중하게 되면서 평균 임금이 상승했다. 반면, 재고관리직은 자동화로 인해 고유의 계산 업무가 사라지자 단순한 물류 작업 중심의 직무로 축소되며 임금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토와 톰슨은 “같은 유형의 과업을 자동화했더라도 그 직업군이 포함하고 있던 나머지 과업의 성격에 따라 일자리의 성격 자체가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 “AI가 가져오는 변화, 지루한 일은 더 지루하게, 창의적 일은 더 창의적으로”
하포드는 “AI는 지루한 일을 더 지루하게, 흥미로운 일을 더 흥미롭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창의적 사고가 필요한 회계직은 반복작업을 줄여 더 많은 아이디어 도출과 분석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반면, 이미 단순작업 중심이던 창고 피킹(picking) 업무는 AI의 도입으로 더욱 기계적인 노동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사례로는 물류창고에서 작업자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며 지시하는 ‘제니퍼 유닛(Jennifer unit)’이라는 이어셋 장비가 있다. 하포드는 “이 장비는 물류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던 인지 부하마저 제거해 인간을 단순한 기계처럼 만드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 정원사와 AI의 공존
한편, 많은 사람들이 AI의 영향에서 벗어난 직업으로 ‘정원사’를 떠올리지만 하포드는 이마저도 예외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능형 드립관개 시스템, 해충 탐지기, 태양광 제초로봇, 레이저 허수아비까지 등장하고 있다”며 “단순 제초나 물주기 작업은 이미 자동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정원사가 고객과 소통하고 공간을 설계하거나 해충을 직접 판단하는 등의 복합적 업무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라며 “정원사에게 필요한 것은 레이저 장비가 아니라 이메일 작성과 고객 응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AI 비서”라고 덧붙였다.
◇ “AI는 직업이 아니라 직무를 바꾼다”
하포드는 AI의 영향을 예측하려면 “AI가 당신의 업무 중 전문성이 요구되는 핵심을 대체할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기피해온 단순 업무를 대신할 것인지”를 자문해보라고 조언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향후 직업의 만족도와 임금 변화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AI는 단순히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을 재구성하고 우리가 무엇을 ‘일’이라고 부를지를 바꾸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