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4000억 달러 불어난 '실탄', 금값·비달러 자산 가치 상승에 역대 최대
달러 강세에도 '조작국' 지정 우려에 사용 주저…日·印 등 구두 개입으로 선회
달러 강세에도 '조작국' 지정 우려에 사용 주저…日·印 등 구두 개입으로 선회
이미지 확대보기아시아 각국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이 총 8조 달러(약 1경1796조 원)에 육박하며 역대급 규모로 불어났다. 이는 글로벌 금융 시장의 불확실성에 대응하고 자국 통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한 강력한 '실탄'을 확보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과 미 재무부의 환율 조작 감시가 강화되는 시점이라,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실제로 사용하는 데는 상당한 정치적·경제적 부담이 따를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20일(현지시각) 블룸버그(Bloomberg)가 집계한 데이터에 따르면, 아시아 주요 11개국 통화 당국이 보유한 외환보유액은 올해 들어서만 4000억 달러(약 589조 원) 이상 증가하며 총 8조 달러(약 1경1796조 원)에 근접했다. 이러한 증가세는 올해 초중반 나타난 달러화 약세와 금값 급등이 주도했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서 유로화나 엔화 등 기타 통화로 표시된 자산의 달러 환산 가치가 상승했고, 금 보유분이 전체 평가액을 밀어 올린 것이다.
국가별로 살펴보면 중국이 올 들어 외환보유액을 1410억 달러(약 207조 원) 늘리며 가장 큰 증가 폭을 기록했고, 일본이 1160억 달러(약 171조 원)를 추가하며 뒤를 이었다. 홍콩 BNY의 위 쿤 총(Wee Khoon Chong) 아시아 태평양 매크로 전략가는 "일부 국가들이 환율 변동성을 줄이기 위한 미세 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 과정에서 외환보유액을 일부 소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의 외환 곳간은 여전히 넉넉한 상태"라며 "현재 역내 국가들의 수입 대금 결제 능력(import cover ratio)은 매우 안정적인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엔·원·루피 동반 추락…킹달러 공습에 뚫리는 방어선
한국 원화는 최근 16년 만에 가장 약한 수준에 근접했으며, 지난 한 달 동안에만 달러 대비 가치가 3.2% 하락했다. 한국 외환 당국은 국민연금공단(NPS)을 포함한 주요 시장 참가자들과 협력하여 환율 방어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상태다.
인도 루피화와 필리핀 페소화 역시 지난 두 달 사이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 특히 인도의 경우 미국이 인도산 수출품에 대해 50%의 관세를 부과하면서 현지 주식 시장에서 자금이 이탈했고, 루피화 가치는 올 들어 3% 이상 하락했다. 인도 중앙은행은 지난 9월 말 기록한 사상 최저치인 달러당 88.80루피 선이 뚫리는 것을 막기 위해 최근 역내외 시장에서 적극적인 개입을 단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엔화 역시 달러 대비 10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자 일본 당국의 경계감이 고조되고 있다. 가타야마 사츠키(Satsuki Katayama) 일본 재무상은 엔화 약세에 대해 경고 수위를 높이며 시장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美 재무부 감시망 가동…트럼프 2기 '관세 보복' 공포
풍부한 외환보유액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은 바로 '트럼프 리스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과거 집권 당시 환율 개입을 고율 관세 부과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다. 자국 통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려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행위를 불공정 무역으로 규정하고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는 논리다.
싱가포르 MUFG 은행의 마이클 완(Michael Wan) 수석 통화 전략가는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자국 통화 약세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징후가 뚜렷하다"면서도 "외환보유액 활용이 1차 방어선이 되겠지만, 미 재무부가 이를 '환율 조작'으로 인식할 가능성과 향후 무역 협상에 미칠 파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대만 중앙은행과 미 재무부는 최근 불공정한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환율이나 국제 통화 시스템에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미국의 압박이 아시아 외환 정책에 실질적인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미 재무부는 지난 6월 발표한 반기 환율 보고서에서 특정 국가를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지는 않았으나, 중국에 대해서는 "투명성이 결여되어 있다"며 날을 세웠다. 현재 미국의 환율 관찰 대상국 명단에는 중국을 비롯해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베트남 등 아시아 주요 수출국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이들 국가는 섣불리 달러 매도 개입에 나섰다가 미국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시아 당국은 직접적인 시장 개입 외에 다른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일본처럼 구두 경고를 통해 시장 심리를 진정시키거나, 말레이시아처럼 기업들의 해외 수익금을 본국으로 송환하도록 장려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결국 아시아 국가들은 8조 달러(약 1경1796조 원)라는 막대한 방어 자금을 손에 쥐고도, 달러 강세라는 파고와 미국의 견제라는 암초 사이에서 정교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환율 방어의 필요성과 통상 마찰의 위험성 사이에서 각국 중앙은행의 셈법은 더욱 복잡해질 전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