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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사막에 갇힌 '칩스법'의 꿈"…TSMC 애리조나 공장, '물·교통' 현실의 벽에 부딪히다

400억 달러 투자에도 주민 243명 "교통·용수난" 격렬 반대…'미니 신도시' 개발 제동
美 반도체 리쇼어링 전략, '인프라·환경'이라는 거대한 복병 만나…TSMC "물 90% 재활용" 총력 대응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미국 정부의 '반도체 굴기'를 상징하는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TSMC 공장 건설 프로젝트가 지역 사회의 거대한 암초에 부딪혔다. 미·중 패권 경쟁 속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400억 달러(약 58조 원)라는 천문학적 자금이 투입되는 이 프로젝트가, 정작 '물 부족'과 '교통 대란'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장벽에 직면했다.

피닉스 지역 뉴스 ABC15에 따르면 지난 13일(현지시각) 저녁, 피닉스 북부 지역의 '노스 게이트웨이 빌리지 기획위원회' 회의장은 수십 명의 성난 주민들로 가득 찼다. TSMC 공장 인근에 '노스파크(NorthPark)'라는 대규모 복합 신도시를 건설하는 안건을 두고 격렬한 반대 의견이 쏟아진 것이다. 이 개발은 TSMC의 수만 명에 달할 엔지니어와 협력사 직원들을 수용하기 위한 필수 기반 시설로, TSMC와 부동산 개발사 펄트 그룹(Pulte Group)이 주도하고 있다.

피닉스시 당국에 따르면, 이 용도 변경 안건에 대해 접수된 의견은 반대·우려 243건, 지지 68건으로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기획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승인 권고' 결정을 내렸으나, 이는 TSMC의 미국 공장 가동이 '칩스법(CHIPS Act)'의 보조금을 넘어 훨씬 더 복잡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함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조용한 사막 마을이 공업지대로"…교통·용수난에 주민 '격노'

주민들의 분노는 '삶의 질' 하락에 집중됐다. 앤 윌지라는 이름의 한 주민은 "우리는 그 교통량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며 "우리는 조용한 우리 커뮤니티를 좋아한다"고 호소했다. 주거지 바로 옆에 '도시 속의 도시(city within a city)'가 들어서며 발생할 극심한 교통 혼잡과 안전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다.

더 근본적인 공포는 '물'에서 나왔다. 사막 기후인 애리조나에서 주민들은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지역의 물 공급에 미칠 파괴적 영향을 우려했다. 짐 움라우프 주민은 "10년 뒤 우리가 '그때 집을 더 지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진 않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때 더 많은 녹지(open space)를 지켰어야 했는데'라고 분명히 돌아보게 될 것"이라고 성토했다. 이들은 주 소유 신탁 부지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와 휴식 공간 감소를 문제 삼으며, 프로젝트를 현 주거지에서 더 먼 루프 303 고속도로 북쪽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이 '물 문제'는 단순한 님비(NIMBY) 현상이 아니다. 반도체 팹(Fab)은 24시간 막대한 양의 '초순수(Ultra Pure Water)'를 필요로 하는 '물을 먹는 하마'다. 미국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한가운데 세계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는 전략 자체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리스크가 주민들의 반발로 표면화된 셈이다.

이에 대해 라파엘 벨라스케스 TSMC 환경·보건·안전 관리자는 "물의 최대 90%를 재활용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반도체 공정에는 물을 초순수 수준으로 정화하는 과정이 필수이며, 이 정화된 물을 그냥 배수구로 흘려보내지 않고 재사용한다"고 해명했다. 또한 40여 년 전 환경 오염의 주범이 됐던 과거의 공장들과 달리, "최신 팹은 정교한 폐기물 처리, 모니터링, 격납 시스템을 통해 유해 화학물질 누출을 원천 차단한다"고 약속했다.

반도체 팹만 지으면 끝?…'인프라·인력'에 발목 잡힌 리쇼어링


이번 사태는 미국 반도체 리쇼어링 전략의 '아킬레스건'을 드러낸다. 정부가 보조금을 쏟아부어 팹을 유치하더라도, 이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반 시설'과 '인력', 그리고 '사회적 합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주민들이 반대하는 '노스파크' 신도시 개발은, 사실 TSMC가 공장을 가동하기 위한 필수 전제조건이다. 수만 명의 고급 엔지니어와 노동자를 사막 한가운데로 불러 모으려면 그들이 거주할 집과 학교, 병원, 상업 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통 대란' 우려 역시 마찬가지다. TSMC는 "트럭 이동 경로를 주거지가 아닌 고속도로로 유도하겠다"고 밝혔지만, 24시간 쉴 새 없이 원자재와 완제품을 실어 날라야 하는 반도체 산업의 물류 시스템과 '조용한 전원 공동체'의 가치관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결국 피닉스시가 내놓은 타협안은 '땅'이었다. 시는 "개발사가 약 2100에이커(약 8.5㎢)의 토지를 시에 무상 기부해 소노란 보호구역(Sonoran Preserve)에 편입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개발 이익의 일부를 녹지 보존으로 환원해 주민 불만을 잠재우려는 시도다.

하지만 이는 거대한 마찰의 시작에 불과하다. TSMC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칩스법'의 성공을 가늠할 핵심 시금석이다. 이 프로젝트가 사막이라는 환경적 한계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국의 건설·운영 비용, 그리고 현지 문화와의 충돌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지 못한다면,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전략은 모래 위에 성을 짓는 격이 될 수 있다. 주민들의 반발을 뚫고 첫 관문을 통과한 이 안건은 오는 12월 4일, 피닉스시 전체 기획위원회에서 다시 다뤄질 예정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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