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재팬' 실패 교훈…라피더스, 순수 파운드리·국제 협력으로 정면 돌파
TSMC 구마모토 '순항' 업은 日…"소부장·후공정 '스리아와세' 기술이 핵심 경쟁력"
TSMC 구마모토 '순항' 업은 日…"소부장·후공정 '스리아와세' 기술이 핵심 경쟁력"
이미지 확대보기한때 세계 정상을 호령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은 오랜 쇠퇴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최근 불확실성 가득한 세계 정세 속에서, 일본이 새로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비즈니스에 도전장을 내민 '라피더스(Rapidus)' 프로젝트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경학(地経学) 분야 최고 권위자인 스즈키 가즈토 도쿄대학 교수는 저서 '지경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현재 일본 반도체 산업의 위치를 진단했다. 스즈키 교수의 분석을 바탕으로 일본 반도체 부활의 핵심 키로 불리는 'TSMC 구마모토 공장'과 '라피더스의 2나노 이하 반도체' 전략을 심층 분석한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의 성공은 막대한 자체 이익을 재원으로 한 지속적인 거대 투자, 그리고 최첨단 장비 도입을 통한 제조 역량 강화에 있었다. 반면 TSMC에 도전했던 수많은 기업은 대부분 성과를 내지 못하고 도태됐다.
과거 인텔이나 삼성전자처럼 설계부터 제조까지 아우르는 IDM(수직 통합형 반도체 기업) 모델을 유지해 온 기업들은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아 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했다. 이들은 TSMC에 대항하려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지만, 충분한 고객을 확보하지 못하며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다. 스즈키 교수는 "TSMC는 단순히 거액 투자를 지속했을 뿐만 아니라, 고객 대응력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며 "이것이 경쟁사들이 쉽게 TSMC의 고객을 빼앗아 오지 못한 이유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TSMC의 또 다른 성공 비결은 대만 신주과학단지 생태계에 있다. 양명교통대학, 공업기술연구원(ITRI) 등 인재 육성 및 연구 기관이 끊임없이 우수 인력을 공급하고, 중소기업인 공급업체들과의 적극적인 공동 연구개발(R&D)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항시 향상시킨 점도 TSMC 성공의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일본 반도체 산업이 쇠퇴한 배경에는 고질적인 '일본 특유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여러 대기업이 각각 회사 내 '일개 부문'으로 반도체 사업을 운영하는 파편화된 구조가 문제였다.
이에 일본 경제산업성(METI)은 이들 기업을 '올 재팬(All Japan)'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로 묶어 국제 경쟁력을 높이려 시도했다. 수많은 '올 재팬' 프로젝트가 추진됐지만, 결과는 모두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기업들이 실상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스즈키 교수는 "경쟁사에 자사의 핵심 기술과 노하우를 노출하는 것에 대한 강한 저항감이 실패의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거 초 LSI(고밀도 집적회로) 시대에는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고, 목표 달성을 통해 모두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성공을 거둔 뒤 이 '올 재팬' 방식을 반복하자, 기업들은 자사의 경쟁력 원천인 기술을 경쟁사에 가르쳐줄 이유가 없다는 방향으로 선회했고, 프로젝트 자체가 표류하게 됐다.
현재 일본에는 메모리 분야의 키옥시아, 로직 반도체의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 등 통합된 형태의 기업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반도체 산업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남은 기업들이 협력해 만든 회사다. 당초 목표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선제적 포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일본 최대 반도체 기업이었던 도시바 메모리를 계승한 키옥시아는 글로벌 시장에서 여전히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낸드플래시 메모리 시장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이어 세계 3위(약 18%)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올 재팬'의 처절한 실패…라피더스는 무엇이 다른가
일본은 이처럼 처절했던 쇠퇴의 이유를 거울삼아 새로운 반도체 산업 구축에 나서고 있다. 그 상징이 바로 홋카이도에 공장을 건설 중인 '라피더스'다. 라피더스는 반도체 제조 장비 업체인 도쿄 일렉트론의 회장을 지낸 히가시 데쓰로를 회장으로, 미국 낸드플래시 제조사 웨스턴 디지털의 일본 법인 사장을 역임한 고이케 아쓰요시를 사장으로 영입해 새로운 파운드리 비즈니스에 도전한다.
라피더스의 목표는 '비욘드 2나노', 즉 회로 선폭 2나노미터(nm) 이하의 최첨단 반도체를 제조하는 것이다. 현재 일본 로직 반도체의 최상위 기술이 40나노 수준임을 고려할 때, 이는 '무모한 도전'에 가깝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경제산업성이 라피더스를 전면 지원하고 있어 과거 정부 주도형 프로젝트의 재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즈키 교수는 "과거 정부 주도형 사업과는 양상이 상당히 다르다"고 강조한다.
가장 큰 차이점은 라피더스가 '올 재팬'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라피더스에 출자한 기업은 대부분 일본 기업이지만, 이들은 반도체 '제조사'가 아닌 순수한 '주주'의 위치에서 투자하고 있다. 투자액 자체는 아직 미미하며 라피더스의 자금은 대부분 경산성의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지만, 적어도 과거처럼 반도체 제조사들을 결집해 세운 회사는 아니다.
라피더스의 출발점은 미국 IBM이 개발 중인 반도체의 '제조'를 맡는 파운드리를 일본에 짓는다는 구상이다. 또한 반도체 개발은 벨기에의 연구개발 기관 IMEC와 연계하는 등, 기술력 향상을 위해 일본을 벗어난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도 과거 '올 재팬'과의 차별점이다.
라피더스는 설계나 개발을 하지 않고 오로지 수탁 제조만 담당하는 '순수 파운드리'를 표방한다. 과거 일본 기업들이 겪었던 IDM 모델의 문제에서 자유롭다. 또한 대기업의 '일부 사업'이 아닌 '반도체 전문 기업'이기에, 타 부문과의 알력 다툼이나 투자를 둘러싼 사내 정치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스즈키 교수는 "라피더스가 과거 일본 반도체 산업의 쇠퇴 흐름과는 구별되는 기업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라피더스의 성공 여부를 현시점에서 예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25년 시제품 공개, 2027년 양산 돌입이라는 일정에 맞춰 진척을 보이고 있어, 현재로서는 계획대로 진행 중이라는 평가다.
TSMC가 꼽은 日의 저력…'소부장·후공정' 생태계
이와 더불어 일본 정부는 보조금을 투입해 TSMC 공장 유치에도 성공했다. 스즈키 교수는 "TSMC 구마모토 공장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건설 중인 공장이 난항을 겪는 것과 뚜렷이 비교된다. 일본이 공장을 차질 없이 건설하고 일정대로 생산에 돌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발주 기업 입장에서 '일본 제조업'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요인이 됐다.
TSMC가 일본을 높이 평가하는 배경에는 일본이 보유한 강력한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도 있다. 장비와 소재가 안정적으로 공급된다는 점은 큰 강점이다. 24시간 근무가 당연시되는 TSMC 특유의 '맹렬한' 기업 문화와 '일하는 방식 개혁'을 추진하는 일본 직원들 간의 문화적 충돌이 우려되기도 했으나, 스즈키 교수는 "현재로서는 큰 문제 없이 공장이 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스즈키 교수는 일본의 '후공정' 기술력을 마지막 강점으로 꼽았다. 그는 "일본은 패키징 등 후공정에서 요구되는 '스리아와세(すり合わせ, 조합·조율)'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며 "자동차 산업이 대표적인 예"라고 설명했다. 최첨단 반도체가 물리적 한계에 가까워지면서, 여러 칩을 쌓아 올리거나(적층) 칩렛(Chiplet)을 만드는 등 복수의 부품을 정밀하게 조합하는 '스리아와세' 기술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이 분야에서 일본은 확실한 강점을 지니고 있으며, 고객의 요구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일본 특유의 기업 경영 방식도 강점으로 발휘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