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동안 달러 가치 3% 하락...2017년 이후 최악의 흐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인상 정책과 세계화 후퇴 움직임이 미국 달러화에 대한 신뢰를 흔들면서 올해 들어 달러화의 위상은 이미 예전과 같지 않은 모습이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지난 3개월 동안 달러화는 31개 주요 통화 중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통화에 대해 하락했다. 블룸버그 달러 지수는 올해 거의 3% 하락하며 2017년 이후 최악의 흐름을 연출했다.
달러화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데 반해 금값은 올해 18차례나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금 선물 가격이 온스당 3100달러를 돌파했다. 과거 안전자산의 양대 축이었던 금과 달러의 명암이 극명히 엇갈리고 있는 셈이다.
미국 온라인 매체 허핑턴포스트는 "주식시장에 매도세가 있을 때 오랫동안 은신처로 사용됐던 달러가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을 찾아 떠나면서 이번에는 랠리를 펼치지 못했다"면서 "미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금, 엔화 및 유럽 주식에 돈이 몰리며 달러화가 빠르게 가라앉았다"고 평가했다.
매체는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불과 두 달이 지난 지금, 관세를 부과하고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세계화를 후퇴시키려는 그의 주장은 80년 동안 세계 금융 시스템의 중심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누려온 달러화에 대한 신뢰를 흔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런던의 외환 중개업체 페퍼스톤의 마이클 브라운 선임 리서치 전략가는 "외환시장에서 최우선 피난처였던 달러화가 이제 정반대의 존재가 됐다"면서 "점점 더 많은 고객이 오토파일럿을 켜고 달러에 숨는 대신 어디를 봐야 할지 묻고 있다"고 말했다.
탈(脫)달러 가속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오히려 달러화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다른 나라들의 대응을 가속화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와 중국을 포함한 브릭스(BRICS) 국가들은 자국 통화로 더 많은 무역 결제를 수행해 달러 기반 거래를 줄이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브릭스 국가들은 '브릭스 브릿지(BRICS Bridge)'로 알려진 디지털 결제 플랫폼도 개발 중이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과 지난 1월에 해당 국가들에 대해 10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브릭스 브리지‘뿐만 아니라 중국도 위안화 국제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의 2024년 말 기준 국제 자금 결제에서 위안화의 비중은 3.8%로 엔화의 비중을 추월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달러화는 여전히 모든 국제 거래에서 결제 통화로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무역 전쟁이 격화하면 달러화의 지배력이 계속 위협받을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도이체방크는 이달 초 보고서에서 “미국이 주요 교역 상대국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러가 실질적으로 강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면서 달러가 전통적인 안전자산 피난처의 지위를 잃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런던 소재 라보뱅크의 제인 폴리 전략가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 정책, 군사 동맹 탈퇴, 캐나다나 그린란드 점령에 대한 일상적인 언급이 "탈달러화 추세를 가속화하고 달러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미국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다"고 분석했다.
추가 하락 전망 확산
달러화가 지난해 말까지의 예상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이후 줄곧 하향 곡선을 그리는 가운데 추가 하락 전망도 힘을 얻고 있다.
달러화는 이번 주 트럼프 대통령이 수입산 자동차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뒤 낙폭을 더 키웠다.
이론적으로는 관세 인상이 수입 수요 감소와 국내 생산량 증가로 이어지면서 달러 강세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실제로는 반대 흐름이 나타난 것이다. 관세 인상이 인플레이션을 재점화하고 성장을 둔화시킬 것이란 우려가 더 크게 부각되면서 투자자들이 달러 매도 대응에 나섰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글로벌 경기 둔화에 대한 우려로 해외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로 자금을 쏟아부을 경우 달러화의 반등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지만,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위기다.
뉴욕 매쿼리 그룹의 티에리 위즈먼 거시 전략가는 "사람들이 미국의 지정학적·경제적 펀더멘털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투자자금이 빠져나간다면 미국 주식시장과 달러가 동반 하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연합(EU)과 방위비 지출 문제로 충돌하면서 독일 등의 재정 지출 확대가 유럽 증시의 랠리를 촉발하며 투자자금이 유럽으로 이동하고 있는 점도 달러 약세/유로 강세를 재촉하고 있다.
프랑스 은행 크레디트아그리콜의 전략가들은 향후 몇 달 동안 달러가 당초 예상보다 더 약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무역 전쟁과 공공 부문 해고 및 이민 제한 정책이 단기적으로 미국 경제 전망에 타격을 줄 것이란 이유에서다.
'대체 불가' 위상, 아직은 굳건
다만 예전만은 못해도 전 세계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이 아직은 굳건하다는 시각이 여전하다.
세계은행(WB) 이코노미스트 출신이자 하버드대학 교수인 카르멘 라인하트는 "통화 가치의 상승과 하락은 세계화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대통령의 등장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달러가 하룻밤 사이에 기축통화로서 영국 파운드를 추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의 배리 아이켄그린 이코노미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유동성이 큰 시장인 미국 국채 시장을 언급하면서 달러의 위상이 쉽게 다른 통화로 대체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달러화는 안전자산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수정 기자 soojunglee@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