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츠 총리 '경제 회복의 해' 선언 넉 달 만에 전망치 1.0%→0.5% 하향
호르무즈 봉쇄 장기화 시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유럽 전역으로 번지는 경기 침체
호르무즈 봉쇄 장기화 시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유럽 전역으로 번지는 경기 침체
이미지 확대보기유럽 최대 경제국 독일의 올해 성장률 전망이 연초 대비 절반으로 쪼그라들었다.
중동 이란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가격 급등이 독일 경기 회복의 싹을 자르고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는 가운데,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경제 갱신의 해'로 내걸었던 2026년이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25일(현지시각) 수백억 유로에 달하는 재정 부양책에도 에너지 가격 급등과 물가 불안이 독일 경제 회복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도했다.
성장률 반토막… 4년 연속 사실상 제자리걸음
독일 경제에너지부는 2026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지난 1월의 1.0%에서 0.5%로 절반 낮췄다. 2027년 전망치도 1.3%에서 0.9%로 하향 조정했다.
카테리나 라이케 경제에너지부 장관은 22일(현지시각) 베를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올해 기대했던 경제 회복세가 외부 지정학적 충격으로 다시 발목이 잡혔다"며 "이란전쟁으로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이 올라 가계 부담을 키우고 기업 비용을 늘리고 있다"고 밝혔다.
코메르츠방크 수석 경제학자 요르크 크레머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근무일 수 증가 효과를 빼면 실질 성장률은 0.3%에 불과하다"며 "이는 사실상 '블랙 제로'(정체 상태)와 같다"고 말했다.
독일 경제는 2023~2024년 2년 연속 역성장한 데 이어 지난해 0.2% 성장에 그쳐 3년 연속 마이너스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이란 전쟁의 파장은 경제 심리 지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독일 경제연구소(Ifo)의 기업환경지수는 4월 84.4로 전월 86.3에서 떨어지며 2020년 5월 코로나19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독일 경제센터(ZEW)의 경기 기대지수도 4월 -17.2로 2022년 12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다. 국제 금융그룹 ING의 거시경제 리서치 총괄 카르스텐 브르제스키는 "에너지 가격 상승이 파티가 시작되기도 전에 독일의 성장 잔치를 망치고 있다"고 말했다.
5000억 유로 부양책도 에너지 충격 앞에 '역부족'
메르츠 총리는 지난해 5월 취임 이후 학교·도로·철도 등 기반시설 정비를 위한 5000억 유로(약 865조원) 규모의 특별기금을 조성하고 국방 예산도 대폭 늘리며 '성장 회복'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골드만삭스 독일 담당 이코노미스트 니클라스 가르나트는 "성장 전망치 하향이 재정 지출 계획에 의미 있는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며 "하반기에는 기반시설·국방 지출이 역사적 패턴대로 더 빠르게 집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현장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독일 발트해 인근 소도시 그노인에서 메클렌부르거 호프 호텔을 운영하는 라르스 슈바르츠 대표는 "손님들이 스파 이용료 같은 부가 지출을 꺼리고, 점심값을 아끼려 아침 식사도 늦게 한다"며 "돈의 가치가 줄어든 만큼 어디서든 허리띠를 졸라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메르츠 총리는 지난 13일 "중동 전쟁의 영향이 오랜 기간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며 16억 유로(약 2조 7700억원) 규모의 유류세 인하 조치를 발표했다.
리터당 17센트 인하를 두 달간 적용하는 이번 조치와 함께 기업이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에너지 위기 지원 보너스 1000유로(약 173만원)까지 비과세 혜택도 부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단기 처방이 경기 전반에 미치는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라이케 장관도 "에너지 가격 경쟁력 확보와 구조 개혁 없이는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우리 기업들이 다시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독일 산업연합체(BDI) 등 주요 경제단체들은 규제 완화, 법인세 인하, 은퇴 연령 상향 연동 등 광범위한 구조 개혁을 재차 촉구하고 나섰다.
청소 제품 제조업체 요하네스 킬 KG의 요하네스 페터 킬 대표는 "주유소 기름값을 낮추는 것은 소비자에게 일시적 도움은 되겠지만 더 광범위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연립 갈등·유럽 전역 전이… 스태그플레이션 경계감 고조
경제 회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에너지 가격만이 아니다. 메르츠 총리는 중도 우파 기독민주당(CDU)과 중도 좌파 사회민주당(SPD)의 연립 정부를 이끌고 있는데, 두 당 모두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으로 지지층이 이탈하며 최근 지지율 합산이 40%를 밑돌고 있다.
독일 상업은행 LBBW의 수석 경제학자 모리츠 크레머는 "지금 연정 내 갈등은 올라프 숄츠 전 총리 때 붕괴한 연정을 떠올리게 한다"며 "임기 초에 단행해야 할 구조 개혁이 지금 속도로는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유럽의 충격파는 독일에 그치지 않는다. 프랑스 정부도 에너지 가격 급등을 반영해 올해 성장률 전망을 1.0%에서 0.9%로 낮추고 60억 유로(약 10조 3900억원) 규모의 예산 집행을 보류했다.
영국 예산책임청(OBR)도 올해 국내총생산 성장률 전망을 1.4%에서 1.1%로 낮췄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지난 1월 전망보다 0.2%포인트 낮은 3.1%로 수정했다.
Ifo 원장 클레멘스 푸에스트는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재정 부양책이 없었다면 독일 경제는 이미 수축 국면에 있었을 것"이라며 독일이 '스태그플레이션 충격의 초입'에 놓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산업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에너지 공급 병목이 길어질 경우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제조업 국가들의 원자재 조달 비용도 함께 높아질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의 수입 원유 대부분은 호르무즈 해협을 경유하는 만큼 에너지 가격 상승이 물가 압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도이체방크(Deutsche Bank) 최고경영자(CEO) 크리스티안 제빙은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에너지 가격 상승이 독일 경제에 최악의 타이밍에 닥쳤다"며 "경제가 막 탄력을 받기 시작한 시점이었다"고 말했다.
DIW베를린 연구소의 제럴딘 다니-크네들리크 이코노미스트는 "이란전쟁이 독일 경제를 다시 침체로 밀어 넣지는 않겠지만 위험은 커지고 있다"며 "호르무즈 해협의 에너지 공급 차질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가 충격의 깊이를 가를 것"이라고 밝혔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