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연합(EU)에서 들어오는 수입품에 대해 최소 15~20%의 기준관세를 요구하면서 협상이 결렬될 경우 최대 30%까지 끌어올릴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유로존 경제가 연내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자동차·제약·식음료 등 다양한 산업이 미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만큼 관세 현실화 시 유럽 수출업계 전반에 충격이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19일(현지시각)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미-EU 간 무역 협상이 수주째 교착 상태에 빠지자 영국과 맺은 10% 기준관세 모델을 EU 전체에 확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FT는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율을 최소 15~20%로 끌어올리는 안을 추진 중이며 협상이 결렬될 경우 30% 부과까지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30% 관세는 유로존 침체 신호탄”…車·제약·철강 고위험군
경제 분석기관 판테온 매크로이코노믹스의 클라우스 비스테센은 “미국이 EU 수입품에 30% 관세를 부과하면 유로존(EZ)은 2025년 하반기 침체에 빠질 것”이라며 “시장 참여자들은 트럼프의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있지만 미-EU 무역 갈등이 본격화될 가능성은 충분히 크다”고 지적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도 이 같은 전망을 공유했다. 앤헬 탈라베라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30% 수준의 미국 관세가 현실화되면 유로존 연간 성장률은 향후 2년간 각각 0.3%포인트씩 하락할 수 있다”며 “이는 유럽 경제를 사실상 침체선상으로 밀어넣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EU는 전체 수출의 약 20%를 미국 시장에 의존하고 있으며 연간 수출 규모는 5000억 유로(약 78조3400억원)에 달한다. 특히 자동차, 제약, 철강 등 고부가가치 산업은 미국 외 대체 시장 확보가 어렵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도이체방크는 “현재 유럽산 제품에 적용되는 실질 평균 관세는 12~17% 수준으로, 연초 1% 미만에서 급등했다”며 “철강과 알루미늄은 50%, 자동차 부품은 25%, 제약품은 최대 200% 관세까지 언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위스키부터 치즈까지…EU 식음료 업계 “미국 수출 포기할 판”
가장 먼저 충격을 체감하고 있는 업계는 중소 식음료 수출기업들이다. 아일랜드 서부 해안에서 위스키와 진을 생산하는 스켈리그식스18 증류소의 준 오코널 최고경영자(CEO)는 CNBC와 인터뷰에서 “미국 시장을 겨냥해 1년 넘게 공을 들였지만 최근 수입업체들이 ‘더는 보내지 말라’고 한다”며 “창고는 이미 가득 찼고, 대형 고객만 우선 순위로 취급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첫 수출을 시작했지만 올해 초 이미 10% 관세가 적용되며 가격 경쟁력이 약화된 상태다.
칵테일에 종종 쓰이는 오렌지 리큐르 ‘트리플 섹’을 제조하는 프랑스의 전통 증류소 콩비에르의 프랑크 슈완 회장은 “30% 관세에 환율까지 반영되면 소비자 최종 가격 인상 폭은 45~50%에 달한다”며 “미국 매출이 절반으로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프랑스산 리큐르에 관세 보복이 이뤄지면 미국산 버번 위스키도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며 “결국 양측 모두 손해보는 구조가 된다”고 경고했다.
EU 식음료 산업을 대표하는 단체 푸드드링크유럽도 “미국과의 연간 교역 규모가 300억 유로(약 44조원)에 달하는데 이번 조치로 농가·생산자뿐 아니라 미국 소비자들도 가격 상승과 선택지 제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 일부 기업 ‘우회 전략’ 모색…그러나 ‘원산지 장벽’에 발목
일부 유럽 제조업체들은 영국 내 조립 공정을 통해 낮은 영국-미국 관세를 적용받는 ‘우회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영국 상공회의소 독일지부의 알렉스 알트만 부회장은 “독일의 한 주방가전 업체는 아시아에서 부품을 수입하고, 이를 영국에서 조립한 뒤 미국에 수출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원산지 규정’이라는 제약**에 직면해 있다. 실질적인 부가가치 창출이 영국 내에서 발생해야만 낮은 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원산지 보호 품목’에 해당하는 위스키, 샴페인, 파르마 햄 등은 생산지를 이전할 수 없어 더 큰 타격이 예상된다.
스켈리그식스18의 준 오코널 CEO는 “이제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같은 다른 시장을 봐야 한다”며 “그러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금융시장은 낙관…그러나 실물경제 충격은 시간문제
이처럼 실물경제는 관세 충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지만 유럽 주요 증시는 아직 낙관적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프랑스 CAC40지수는 올해 들어 6% 상승했고 독일 DAX지수는 군비 지출 확대 기대감에 21.69% 급등했다. 영국 FTSE100지수도 장중 처음으로 9000선을 돌파했다.
전문가들은 “투자자들이 미-EU 간 최종 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지만 고율 관세가 실제로 시행되면 충격은 금융시장에 급속히 반영될 것”이라며 “시장 낙관론이 지속되기 어렵다”고 경고하고 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