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반도체 경쟁 전선이 중국, 대만에 이어 싱가포르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이 여전히 최대 경쟁 국가지만 대만이 파운드리 등의 성장으로 세계 수출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사들의 아시아 허브 역할을 하는 싱가포르는 반도체 기업들의 대체 설비투자 지역으로 각광받으면서 미·중 패권 경쟁의 반사이익을 봤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치고 나가도록 반도체 특별법을 통한 정부 지원이 더 절실해졌다.
16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발표한 ‘10대 수출 품목의 글로벌 경쟁 동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과 대만 등 다른 나라들과 벌이는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코트라는 2019년부터 올해 3분기까지 미국과 중국 등 주요 국가의 한국에 대한 수출경합도 지수를 분석했다. 수출경합도는 수출 구조가 유사해 경쟁이 심해지는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다.
중국은 반도체 부문 주요 국가 가운데 올해 3분기 기준으로 한국과 수출경합도가 72.2로 가장 높았다. 한국과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를 두고 경쟁을 치열하게 벌인 영향이다. 다만 2019년과 비교하면 3.1포인트 하락했다.
대만의 경우 한국과의 반도체 수출경합도가 32.5로 낮은 편이지만 4년 전보다 7.6포인트 상승했다. 주요 반도체 수출국 가운데 상승폭이 가장 컸다. 대만은 반도체 설계와 파운드리 등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해 세계 3위의 반도체 수출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이 시스템 반도체 수출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지만 최근 경쟁이 심화하는 흐름을 반영한 결과다.
코트라는 “중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며 “대만은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 앞서 있다”고 진단했다.
싱가포르는 수출경합도가 58.2를 기록해 2019년 이후 4.1포인트 상승했다. 미국·대만과 중국이 인공지능(AI) 반도체 산업 주도권을 두고 다투고, 중국과 대만 간 긴장도가 높아지면서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설비를 투자할 대체 지역을 찾아 나선 결과다. 2023년에는 미국의 파운드리 기업 ‘글로벌 파운드리’가 싱가포르에 약 40억 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세웠다. 대만 2위 반도체 기업 ‘유나이티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도 5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한국이 반도체 기술 격차를 벌리지 못하면 수출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코트라는 “첨단 산업에서 기술력을 바탕으로 수출시장 점유율을 확대해 나가야 할 시점”이라며 “반도체는 자동차·부품 등과 함께 주요국 정부가 보조금 지급 및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전략적인 지원에 나서는 분야로서 한국 기업의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한 지원 전략이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시장에서 뒤처진다는 우려는 반도체특별법 제정이 늦어지면서 더 커지고 있다.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업계를 지원하는 방안을 담은 반도체특별법은 정기국회가 종료되는 지난 10일까지 본회의에 상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비상계엄 사태가 탄핵 정국을 촉발하면서 반도체특별법 등 각종 경제법안 논의가 멈췄다.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탄핵 정국이 일단락됐으나 정기국회 기간이 끝나 연내 통과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정승현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rn72benec@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