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오랜 시간 장고를 거듭하던 ‘미국 반도체 패키지 공장’의 윤곽이 마침내 드러났다.
26일(현지 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SK하이닉스가 미국 인디애나주 서부 웨스트 라피엣에 40억 달러(약 5조3000억원)를 투자해 첨단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건설한다고 보도했다.
특히 SK하이닉스의 이번 미국 패키징 공장은 최근 인공지능(AI) 반도체 열풍으로 엔비디아와 함께 입지가 크게 상승한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기업 대만 TSMC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현재 TSMC가 거의 독점하고 있는 첨단 AI 반도체의 고대역폭메모리(HBM) 패키징 물량의 일부를 HBM 핵심 제조사인 SK하이닉스가 직접 맡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HBM은 ‘고대역폭’이라는 이름 그대로 기존 D램보다 몇 배 이상 넓은 대역폭을 통해 초당 데이터 처리량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것이 특징이다.
다만, 개별 칩이나 모듈 형태로 공급되는 일반 D램과 달리 HBM은 고대역폭 구현을 위해 메모리를 수직으로 쌓아 올린 ‘수직 적층 구조’와 더불어, 중앙처리장치(CPU) 또는 그래픽처리장치(GPU) 같은 핵심 연산 칩에 직접 연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즉 서로 다른 종류의 반도체를 하나의 칩으로 연결 및 통합하는 ‘패키징 공정’(후공정)이 필수다.
지금까지 엔비디아 최신 AI 칩에 HBM을 통합하는 패키징 작업은 TSMC의 첨단 CoWoS(칩온웨이퍼-온서브스트레이트) 패키징 공정이 거의 독점해 왔다.
엔비디아 AI 칩이 폭발적인 수요에도 리드타임(반도체 주문 후 인도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6개월에서 1년까지 걸릴 정도로 공급 부족이 심각했던 이유도 TSMC의 CoWoS 패키징 처리 물량이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TSMC도 최근 늘어나는 AI 반도체 주문량을 감당하기 위해 대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대만 내 이곳저곳에 신규 CoWoS 패키징 공장을 추가로 증설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로 HBM을 상용화한 회사인 만큼 자체적으로도 HBM 패키징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AI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전까지 HBM의 시장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기에 함부로 규모를 키우기 어려웠다. 또 상대적으로 빈약한 SK하이닉스의 파운드리 능력으로는 엔비디아를 비롯한 고객사들의 요구 물량만큼의 HBM 패키징이 불가능했다.
결국 SK하이닉스는 HBM 초창기부터 TSMC와 패키징 부문에서 긴밀한 협력을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현재 TSMC가 엔비디아 AI 칩의 HBM 패키징을 거의 전담하는 것도 양사의 오랜 협력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AI 열풍으로 HBM에 대한 시장 수요는 탄탄해졌고, 기술이나 수익 면에서 SK하이닉스의 새로운 주력 제품으로 급부상했다. 미국에 패키징 전용 공장을 세우는 이유도 HBM을 가장 잘 아는 자신들이 엔비디아를 비롯한 수많은 고객사에 직접 패키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TSMC는 자신들의 첨단 CoWoS 패키징 기술의 외부 유출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이슈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독일 등에 잇달아 현지 파운드리 공장을 세우면서도, CoWoS 패키징 공장만큼은 대만 내에만 세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HBM을 사용하는 첨단 AI 칩 개발사는 최종 패키징을 위해 무조건 대만으로 제품을 보내야 하고, 이는 불필요한 제조 시간 및 비용 증가 요인으로 작용해 AI 반도체의 가격을 높이는 원인이 된다.
반면, SK하이닉스의 미국 패키징 공장은 대만까지 제품을 보낼 필요 없이 미국 내에서 최종 패키징 공정까지 마칠 수 있는 이점을 제공한다. 공급망 관리에 신경 쓰고 있는 미국 정부는 물론, 비용 절감을 추구하는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SK하이닉스의 패키징 공장이 완공 및 가동되는 것은 최소 2028년 이후로 예상된다. 그때까지는 HBM 패키징 부문에서 TSMC의 우위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다만, 장기적으로 미국 반도체 회사들의 HBM 패키징 물량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SK하이닉스가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이는 HBM 패키징 부문에서 오랜 협력관계였던 SK하이닉스와 TSMC 양사의 관계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최용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pch@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