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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네덜란드병과 반도체 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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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전 고려대 교수
1959년, 네덜란드 북부 흐로닝언에서 유럽 최대 규모의 천연가스전이 발견되었다. 국토의 4분의 1이 바다보다 낮은 작은 나라에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1960~70년대 가스 수출이 본격화하자 외화가 쏟아져 들어왔고, 국가 재정은 넉넉해졌다. 정부는 늘어난 세수로 복지를 확대했고 국민은 풍요를 만끽했다. 누구도 이 축복이 독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축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스 수출로 외화가 넘쳐나자 길더화 가치가 급등했다. 통화 강세는 곧 다른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 하락을 의미했다. 조선, 섬유, 기계 등 네덜란드 경제를 받쳐온 제조업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본과 인력은 수익성 높은 에너지 부문으로 몰렸고, 나머지 산업은 투자에서 소외되었다. 가스 수입에 기대 팽창한 복지 지출은 경기가 꺾인 뒤에도 줄일 수 없는 고정비가 되었다. 1970년대 말 네덜란드는 높은 실업률과 재정 적자, 성장 정체라는 삼중고에 빠졌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1977년 이 현상에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원 부국이 자원 때문에 오히려 가난해지는 역설, 이른바 '자원의 저주'를 상징하는 용어가 탄생한 것이다.

네덜란드가 이 병에서 벗어나는 데는 뼈아픈 시간이 필요했다. 1982년 노사정이 임금 억제와 노동시간 단축, 고용 확대를 맞바꾼 바세나르 협약을 맺고 나서야 경제는 회복의 길에 들어섰다. 병을 얻는 데는 10여 년이면 충분했지만, 치유에는 한 세대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같은 북해 자원을 손에 쥐고도 전혀 다른 길을 걸은 노르웨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69년 북해 유전을 발견한 노르웨이는 이웃 네덜란드의 실패를 지켜보며 석유 수입을 곧바로 국가 예산에 쏟아붓지 않았다. 석유 수입은 국부펀드에 적립하고, 정부가 매년 쓸 수 있는 돈은 펀드 기대수익의 일정 비율로 묶었다. 자원이 가져다준 부를 현세대의 소비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자산으로 돌린 것이다. 같은 축복을 받고도 한 나라는 병을 얻었고 한 나라는 체력을 길렀다. 차이를 만든 것은 자원이 아니라 제도였다.
이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국 경제가 반도체라는 거대한 가스전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붐이 몰고 온 메모리 슈퍼사이클은 상상을 뛰어넘는 실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올해 8월 반도체 수출은 전년 대비 209% 급증한 466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상반기 경상수지 흑자는 1,910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478억 달러의 네 배에 달한다. 해외 주요 투자은행들이 내놓은 올해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 전망치는 8월 평균 16%까지 올랐고, 사상 처음 20%에 육박할 것이란 관측까지 나온다. 산유국에서나 볼 법한 숫자다.

성장률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3분기 실질 GDP는 전기 대비 1.0% 늘어 한은의 8월 전망치 0.3%를 세 배 넘게 웃돌았다. 실질 국내총소득(GDI)은 전년 동기 대비 18.8% 늘어 1977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를 기록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박수만 칠 일이 아니다. 성장을 끌어올린 것은 반도체 수출과 반도체 제조장비를 중심으로 한 설비투자였다. 같은 기간 민간소비는 0.2% 뒷걸음질했고, 서비스업 성장률은 0.2%에 그쳤다. 반도체 한 업종이 성장률 1%를 만들고 나머지 경제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구조, 이것이야말로 네덜란드 병의 전형적인 초기 증상이다.

물론 호황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다만 숫자가 화려할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네덜란드 병의 초기 증상은 하나같이 '좋은 소식'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한국 경제에서도 비슷한 징후가 감지된다.

첫째, 쏠림이다. 수출 증가분의 대부분을 반도체가 차지하면서 나머지 산업의 부진은 통계 뒤로 가려지고 있다. 석유화학, 철강, 디스플레이 등 한때 한국 경제의 기둥이던 산업은 중국의 공세 속에 구조조정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러나 사상 최대 흑자라는 헤드라인 앞에서 이들의 위기는 좀처럼 정책의 우선순위에 오르지 못한다.
둘째, 인재와 자본의 편중이다. 이공계 우수 인력과 투자 자금이 반도체와 그 연관 분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시장의 신호를 따르는 합리적 선택이지만, 그 결과 다음 세대의 먹거리가 될 산업의 토양은 메말라 간다. 네덜란드에서 자본과 인력이 가스로 몰리며 제조업이 공동화된 과정과 다르지 않다.

셋째, 재정의 착시다. 반도체 호황으로 법인세가 급증하면 정부는 이를 항구적 세수로 착각하기 쉽다. 메모리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다. 호황기 세수에 맞춰 늘린 지출은 불황기에 고스란히 재정 적자로 돌아온다. 네덜란드가 가스 수입으로 키운 복지가 훗날 족쇄가 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 쓴맛을 본 적이 있다. 2019년과 2023년, 메모리 가격이 꺾이자 반도체 수출은 한 해 만에 20% 넘게 줄었고 법인세수는 급감했으며 경상수지도 휘청였다. 호황의 정점에서 불황을 대비하지 않으면 그 대가는 언제나 가장 약한 고리부터 치르게 된다.

넷째, 통화 가치의 문제다.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는 장기적으로 원화 절상 압력으로 작용한다. 반도체는 기술 우위로 버틸 수 있지만, 가격 경쟁력에 기대는 중소 제조업과 비반도체 수출 기업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

다섯째, 체감과 지표의 괴리다. 수출 통계는 연일 신기록을 쓰고 있지만 민간소비가 뒷걸음질하는 데서 보듯 골목 상권과 중소기업 현장의 온기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반도체가 벌어들인 이익은 소수의 대기업과 그 협력사, 주주에게 집중되고, 고용 창출 효과는 매출 규모에 비해 크지 않다. 성장의 과실이 고르게 퍼지지 않는 경제에서 지표상의 호황은 사회적 박탈감을 키우고, 이는 다시 정치적 포퓰리즘의 토양이 된다. 네덜란드 병은 경제의 병이기 전에 착시의 병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반도체 호황이 가져온 초과 세수를 일반 예산에 녹이지 말고 별도로 적립해 미래 산업과 경기 하강기를 대비하는 재원으로 써야 한다. 노르웨이가 석유 수입을 국부펀드에 묶어둔 지혜를 참고할 만하다. 다음으로, 지금이야말로 비반도체 산업의 체질 개선과 서비스업 규제 혁파를 밀어붙일 적기다. 곳간이 넉넉할 때 해야 할 구조개혁을 미루면, 곳간이 빌 때는 할 수조차 없다. 내수와 서비스업이 함께 자라지 않는 성장은 사상누각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시장과 교육 체계를 특정 산업의 수요에만 맞추지 말고, 산업 지형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다변화해야 한다.

네덜란드의 교훈은 자원이 저주가 아니라 자원에 취한 안일함이 저주였다는 데 있다. 반도체는 분명 한국 경제의 축복이다. 그러나 분기 성장률 1%가 반도체 한 업종의 성적표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경제 전체의 건강진단서가 될 수 없다. 축복을 축복으로 남겨두는 것은 축복 그 자체가 아니라, 축복 앞에서 깨어 있는 정신이다. 사상 최대 흑자라는 축배를 들기 전에, 우리가 혹시 흐로닝언의 가스전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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