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지난달 프랑스 퐁피두센터 분관 개관 당시 예술단체들은 63빌딩 앞에서 “피로 얼룩진 자본 위에서 예술 하기를 거부한다”며 피켓을 들었다. 시위대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과 한화 계열사의 현지 방산 협력을 근거로 퐁피두센터 한화 개관을 ‘아트워싱’이라고 규탄했다.
프랑스에서도 거센 반발이 일었다. 현지 예술가와 철학자 100여 명은 지난 5월 일간지 리베라시옹 기고문에서 퐁피두센터와 한화의 협력 중단을 촉구했으며, 현지 언론도 반대 집회 현장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국내 대중의 시선은 이와 달리 싸늘했다. 예술단체들이 안보를 떠받치는 방위산업을 무조건적인 ‘악’으로 매도하고 세계적 미술관을 들여온 기업의 문화 투자마저 가로막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방위산업은 ‘현실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보루라는 점에서 국민들의 목소리는 타당하다. 다만 예술가들은 서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 채 유지되는 평화가 아니라 총구를 겨눌 필요가 없는 '비현실적인 평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항변 역시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는 비난이 쏟아질 수도 있지만, 애초에 예술의 역할이 현실을 적나라하게 중계하는 데 있던가. 예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뉴스 보도가 아니며, 현실 너머를 응시하며 이상을 따르는 것이 예술의 본령이다.
전쟁 없는 세계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끝까지 유보하는 예술가들을 향해 섣부른 비판만 던지기엔 그들이 품은 이상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이번 논란에서 남는 의문은 종합 방산 기업인 한화가 왜 하필 예술계에 자본을 투자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미지 쇄신이 목적이었다 하더라도 대체할 수 있는 대안들을 두고 불가피한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방산 자본을 예술 아래 밀어 넣은 선택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서로를 겨눈 총구의 그림자 위에서 예술의 숭고함을 논하는 일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지,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지현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hyunda92@g-enews.com













